얼떨결에 성찰 흉내를 내면서 떨지도 그렇지도 않은 시간 동안 혼자 멍 때리고 있으니 어느새 대기 시간을 가득 채웠다. 찰나 동안이라도 나를 황홀하게 해 줄 점심메뉴나 생각해볼까 했지만 그 사이 면접 안내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20분 정도 쉬시고 면접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면접은 한 명씩 들어가고 안에는 사장님, 대표님, 전무님, 국장님까지 네 분 계시니까 참고하세요.”
안내사항을 들으면서도 저 느끼하게 생긴 남자의 결혼 유무를 생각하며 최대한 긴장을 덜었다. 아마 했겠지. 아냐. 결혼은 엄청 어려운 거라 그랬어.
최종 합격을 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만약 취업을 하게 되면 내가 갖춰야 할 정상적인 인간의 조건들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사회라는 공간에서 무릇 어른인 척해야 한다는 것인데 쉽게 말한다면 나대지 않는 것이겠지. 여기서 다시 나대지 않는 것이라면 잘난 척하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고 너무 모자라서는 안 될 것이고 조직 내에서 장단도 잘 맞춰야 할 것이고 신사다워야 하고 그렇다고 가식적인 요소가 짙으면 사람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군대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또 시간을 보낼수록 업무와 조직에 대한 책임감도 빠질 수 없겠지. 그동안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업무에 대한 책임감은 배워왔지만 아르바이트랑은 또 무게감이 확연히 다를 것이다. 역시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부 나와 맞지 않는 것이니까. 나는 대책 없이 규율을 따르지 않는 걸 좋아하고 얌전히 있질 못하고 남 말을 듣지 않고 내 멋대로만 행동하니까. 성격 참 답도 없네. 언젠간 나도 어른이 되어있겠지.
가만 생각해보니 아르바이트 경험으로는 요즘 세대에서 밀리지 않을 정도의 인재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어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한 패스트푸드점부터 심야 편의점, 예식장 서빙, 야외공연 무대 설치, 온갖 식당과 술집들까지 전부 세어보면 거의 스무 곳이 넘었으니까.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일본에서 1년 넘게 신문배달원으로 일한 경험이다. 새벽 2시 20분에 일어나 오전 6시 40분까지 350매의 신문을 배달하고 또 오후 2시 40분부터 5시까지는 240매의 석간신문을 배달을 하면 하루 근무는 끝이 난다. 저녁을 먹고 잠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 그다음 날 새벽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고 오전에는 따로 어학교까지 다녔으니 젊은 시기의 패기가 참 당찼었다. 잠은 죽어서 자도 된다고 다짐하면서.
한국사 시험을 공부하고 나서부터는 일본이란 나라에 무슨 방법으로든 꼭 복수하겠다는 계획이지만 한 때는 일본인들의 국민성에 매료되기도 했었다.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일본인이 내게 친절을 베풀었으니까. 가식 섞인 친절이라고들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곳에서 친절의 진정한 의미까지 헤아릴 여유는 없었다. 교육되고 형식적인 친절이라도 그것만으로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가장 눈엣가시였던 건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었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을 이용해 이상한 한인교회를 다니자고 꼬드기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일본에 발 닿기 전부터 수많은 지인들에게 한국인들만 조심하라는 조언을 듣고 속으론 설마 같은 한국인들끼리 그렇게 등골 빼먹겠냐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일본에서 만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서로를 이용할 생각만 하는 아주 질이 나쁜 인간들뿐이었다. 직업소개비로 수백만 원을 뜯어내려 하거나 한인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거나. 이때부터는 인간의 두 눈동자를 보며 이 사람의 정직 유무를 판단하는 연습을 했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 내게 잘해줄 경우에는 아주 엄격한 의심을 하는 습관을 들이면서. 누구라도 정이라는 아주 순한 감정들을 들먹이며 밥을 사준다 해도 얻어먹지 않았고 생일에 주는 선물들도 받지 않았다. 어차피 내게 주었던 정과 선물들 모두 돈으로 환산해서 달라고 할 게 뻔하니까. 그 정도로 나는 이 당시에 한국인들을 적대시했던 기억뿐이다. 어차피 우리 민족은 등 돌리는 민족이라 깎아내리면서.
혼자 심심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어느새 나보고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내 시간을 방해하는 느끼남한테 짜증이 솟구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깥에서는 이놈의 성질머리 죽이고 살아야겠지. 들어가자마자 4명의 아저씨들보다는 쾌쾌한 냄새와 가습기 5대는 튼 것 같이 내부가 뿌연 면접 장소가 더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보조개 보이는 겉치레 가득한 환한 미소로 우렁차게 인사했고 그렇게 내 면접은 시작됐다.
“우선 본인 소개에 대해 1분 정도로 말씀해주세요.”
가식적이고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단어를 섞어가며 요새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투지, 열정을 중심으로 주절주절 자기소개를 마쳤다. 4명의 눈치를 살펴보니 기대에 가득 찬 것 같지도 않고 실망한 것 같지도 않은 분위기에 차라리 성대모사라도 몇 개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본 생활을 좀 하셨네요? 얼마나 계셨어요?”
4명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네. 1년 좀 넘게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타지 생활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군 전역 후에 무작정 떠났었습니다.”
그러고는 취미, 인생철학, 각오까지 내게 존재하지 않는 거짓말들을 서로가 주고받았고 좋은 분위기 탓을 해야 하는 건지 어느 순간부터는 소개팅에서나 나와야 할 질문들도 들어왔다.
“그럼 축구 잘해요? 저희 회사가 축구하면 또 지역에서 유명하거든요. 저희 언론사 체육대회 10연패 아닌가요. 국장님?”
면접의 중반쯤 되고 나서야 면접관 앞에 작은 팻말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스치듯 팻말을 보니 말이 제일 많은 젊은 양반이 대표였고 제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국장이었다. 면접에서 대표가 저런 시답잖은 질문을 한다고? 순간 인상을 찡그렸지만 어색함을 풀려는 의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이때부터는 면접의 끝이 서서히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집에 가서 눕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이후 잔잔하고 지루한 면접은 3분 정도 더 이어졌고 나는 처음과 같은 음성과 분위기로 똑같이 인사를 한 후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교통비를 챙겨 받고 꺼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켜보니 뒤늦게 엄마의 연락이 닿아있었다.
“아들. 오늘 잘하고 와.”
문자를 보고 곧바로 엄마에게 전화하려 했지만 서둘러 회사 근처를 떠나고 싶은 생각에 누군가와의 연락은 다음으로 미뤘다. 면접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거리를 걸으면서 내 안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아가 있는지 세어보았다. 마냥 우스꽝스러운 사람, 나서기 싫고 조용히 지내고 싶은 사람, 가끔은 외로움 타면서 연애 생각도 하는 사람, 효자인 척 하는 사람, 성숙한 척하는 사람, 순진한 척, 착한 척하는 사람, 한껏 예민한 사람, 내가 봐도 그냥 꼴 보기 싫은 사람까지. 당장 떠오르던 자아들만 이렇게 흘러넘치는데 아마 시간을 잡고 생각하면 수십 명의 자아들이 내 안에 살고 있겠지. 그동안 내가 인사하지 못한 자아들까지도.
단순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지만 매번 그렇게 살지 못했고 그동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어떤 습성과 성격을 가졌는지 뭘 싫어하고 뭘 죽도록 좋아하는지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성향조차 모르고 살고 있었으니까. 단지 지난 몇 년간 남들과 똑같은 유흥과 편함에만 빠져 나태해지고 말았지. 그것이 주는 의미와 경험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면 그래도 추억과 회상이라는 토닥임으로 작은 위안 삼았다.
나답지 않게 진지해졌다. 면접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해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내 모습이나 능력이 하찮게 느껴질수록 지난 세월을 후회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철없이 걸어온 모든 행적들을 후회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해. 그나마 젊을 때 그렇게 철부지로 사는 게 나이 들고 그러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으로 자기 합리화에 성공했다. 나이 들고 또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그런 인간이겠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그리고 얕지만 넓은 범위에서 많은 것을 해봤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내 경험들도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로 자리 잡고 있다. 누군가는 못해본 사실들에 대해 어떠한 우월감보다는 다양한 것을 경험한 시절에 대해 인생을 보다 실속 있게, 그리고 조금은 특별히 살았다는 느낌이 드니까. 한 때는 부끄러워했던 일들도 있었지만 가끔 한 번씩은 내 성격에 그런 일도 해봤다는 사실들에 대해 대견하고 기특할 때도 있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나를 돌아보며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도 어느새 내가 아끼는 순간들이 되어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내 모습들과 조우하기도 할 것이다. 나조차도 싫어하는 성질들의 모습들을 만날까 괜히 두렵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또 다른 아주 올곧은 자아들로 잘 구슬려봐야 하겠지. 앞으로의 걱정만 늘어놓다 보면 내 오랜 점쟁이 아주머니의 조언만 떠오른다. 너는 30대부터 술만 조심하라는 아주 현실감 있는 조언.
면접을 마치고 일주일 정도 흘렀을까. 합격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합격 통보에 확신이 차있다면 그것도 내게 어색했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옆구리 한쪽을 긁고 있을 때쯤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왔다. 긁던 부분을 시원하게 마저 긁고 느지막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00일보 최종 합격 통보 연락드립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면접날 우리를 안내하던 느끼남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 몇 초 사이였지만 많은 느낌과 감정들이 내 안에서 솟구쳤다. 감격의 느낌이 들기도 했고 일단 무엇에 대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유 없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래도 부모님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다시 평온해졌다.
이번에는 기분 좋은 척 연기를 하려했지만 결국 타이밍을 놓쳐 서류 전형 합격했을 때보다 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일주일 뒤 7일부터 출근하시면 되고 연봉이나 근무 체계 같은 거는 그날 오시면 전부 공지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그래도 한동안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수십 개의 자기소개서를 써 내려가며 나름대로 사회에서 생존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직장인 선고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좀 더 백수생활을 즐기며 낮잠을 마음대로 즐기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메이저 언론사가 아니어서 그랬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선택한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그리 떳떳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결국 현실에 굴복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너무 채찍질하지 말아야지. 남들 다 이렇게 산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