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ramram Feb 23. 2022

나도 바람나는 거 아니겠지?

결혼하면 잘 살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아무 걱정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한 때는 성숙의 미완성 형태로 자리 잡은 내 인격이 ‘불륜’의 문제에 있어서 크게 문제 인식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청률 보장 하나만으로 ‘불륜’ 소재를 들이붓는 드라마를 볼 때마다 그 엔딩에서는 한 가정이 파탄 나는 결과까지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그럴 때면 속으로 ‘나도 바람피우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고선 ‘설마....’라는 다짐과 함께 생각을 곤히 잠재운다.

 언젠가 한 번은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면서 여자친구는 점심 메뉴를 논의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

 “우리는 바람피우면 그냥 솔직히 말해주자. 뒤에서 저러지 말고.”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줄 수 있어?” 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대화가 될 것 같았다. 

 “음.... 용서도 안 되겠는데? 그냥 뒤에서 저러면 더 상처일 것 같으니, 우리가 사랑한 정을 생각해서라도 마지막 배려의 개념으로?”

 “하긴, 매도 빨리 맞는 게 낫지. 근데 잠깐 번뜩이는 정분이었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냥 당분간은 조용히 숨기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뭐가 중요해. 잠깐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건데. 그러면 끝난 거지.”

 순간적으로 ‘이성에 대한 떨림이 어떻게 한 사람한테만 생기냐?’ 장난식으로 말을 건네려 했지만, 며칠 동안 삐칠 것 같은 여자친구의 표정이 그려져 겨우 참았다. 

 “난 사실 저런 상황을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한 번은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약 내 와이프가 바람피운다면 무조건 바람피운 사람이 잘못한 건 맞지만, 나도 어느 정도 소홀한 점이 있었으니, 배우자가 바람피운 것 아니겠어?” 그 배신감을 직접 당해보지 않은 탓인지 마음이 넓을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 괜히 쿨한 척했다. 

 “다른 사람한테 몸이나 마음 줬던 걸 아는데,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생활이 가능하겠어? 난 계속 생각나서 절대 안 될 것 같아.” 순간 여성과 남성의 차이인지도 헷갈렸다.

 “힘들겠지. 근데 힘들어도 못 살 거 있어? 결국 시간 지나면 살아지겠지 뭐. 특히 자식까지 있으면 자식 생각해서라도 끝내는 건 절대 안 돼” 

 “아무튼 결혼해서 다른 여자랑 하루 이틀 연락이라도 해봐. 오빠 잘 때 내가 핸드폰 몰래 열어보는 거 알지?” 연애한 지 1년 후부터는 어디서 불길한 얘기를 들었는지 내 휴대폰의 비밀번호 설정을 전부 풀어놓으라고 했고, 그때부터는 불시에 내 휴대폰을 검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사생활 침해를 거들어 거부의 표현을 강력하게 시위했지만, 여자친구에게 통할 리 없다. 그렇게 3년이 흐른 뒤에는 이제 여자친구가 내 핸드폰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완벽의 경지에 오르기도 했다. 업무상 하는 연락에도 다정하게 카톡하지 말라는 훈계가 여전하지만. 

 아. 다시 생각해보니, 여자친구가 내 휴대폰 불시단속에 돌입한 시기는 그때부터였다. 내 한마디가 발단이었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술이 조금 들어가면 이성이 새롭게 보인다. 나도 그 말의 의미가 대충 뭔지 알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그때부터는 내가 술을 마시러 간다고 할 때마다 “왜? 또 이성들을 새롭게 보시게?”라며 툴툴거렸고, 목숨 정도 걸어야 겨우 술을 마시러 갈 수 있었다. 

 진심이기도 했다. 나도 다른 남자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도 강인하지 않은 정신상태가 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더 흐트러지고, 그렇다 보니 평소에는 전혀 설레지 않을 행동들과 몸짓들이 내게 새로운 매력들로 다가오기도 했다. 술로 인해 분위기가 나른해질 어느 시점부터 옆 사람의 이성과 서로 허벅지가 닿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부하지 않거나 상대방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행동, 서로에게 던지는 시선 등 정말 하찮은 일상에서도 뜻하지 않은 떨림이 존재한다. 그 대상의 이성들이 평소에 조금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이성이라면, 또 설레게 하는 행동들이 반복된다면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겠지. 좋은 인연의 시작일 수도 있고, 불륜의 시작일 수도 있고.

 다행인 건 내 주입식 교육이 연차가 쌓일수록 먹히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술과 함께라면 설렘만 쫓아가는 욕정에 찌든 청년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잠깐의 설렘이 신호를 알리면 ‘안 돼. 네 인생 망치고 싶어?’의 경고등이 자동으로 켜진다. 내 이런 변화에 있어서는 쾌락주의의 끝을 달리다 결혼생활의 끝도 봐버린 선배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선배가 당시 이혼했을 때만 하더라도 “요즘 시대에 뭐 이혼이 대수라고.”정도의 위로를 해주었고, 실제로 이혼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배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눈앞에서 보고 나니 그 이후부터는 ‘절대 이런 식으로 이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인생이 어떻게 나락으로 빠지는지, 한 순간 감정의 장난질로 완벽했던 인간이 어떻게 미쳐가는지 두 눈 똑똑히 보았다.

 하루는 그 선배가 술에 취해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온갖 여자에게 치근덕대고, 그렇게 뜨겁게 만나고,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즐기는 것 같지? 맞아. 그런 시절이 있기도 하지. 나도 결혼하면 달라질 줄 알았어. 근데 하루아침에 수컷들 본성, 어디 가겠어? 남자들, 진짜 결혼 전에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각오 단단히 해야 돼. 인생 쫄딱 망하기 싫으면. 어차피 걸리게 돼있거든.”

 최근에 다시 만난 그 선배의 얼굴은 그래도 이혼 직후보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운동도 하면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지만, 그렇게 잘하기로 소문난 일은 아직 못하고 있었다. 선배가 알려준 충고를 통해 내가 앞으로 결혼해서 잘 살아간다면 평생 고마워하면서 살아야겠지. 선배가 아니었다면 막막한 그 길을 내가 걸었을 수도 있었으니. 선배에게 어떻게든 위로와 고마움을 조심스럽게 전하고 싶었다. 

 “형. 앞으로 평생 술은 내가 살게.”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전 08화 예비 장모님(?)과의 첫 만남 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