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실 출판사의 7주년 기념식 <시글벅적 난장판>이 달아실 출판사 주간인 박제영 시인의 즉흥적인 제의로 이루어진 모임이어서 더욱 뜻깊었다. 인생이 늘 각본대로 진행된다면 얼마나 따분한 것일까?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는 일탈의 즐거움, 즉흥적인 짧은 시간의 모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과는 방향이 다른 여러 작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어 무엇보다 즐거웠다.
그날 여러 시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지만, 김미량 시인과는 간단히 서로의 소개만을 하였을 뿐 특별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시글벅적 난장판>의 모임에 나가기 전에 그녀의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적이 있다]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시편들 중 시인 자신을 소개하는 시<미량>, <도망가자는 말을 들었다>, <쿠키에 물렸다> <팬티의 힘>등을 읽으며 그녀가 빙벽을 타는 등산가이거나 쿠키를 만드는 직업에 종사하거나 남성용 트렁크 팬티를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중년의 여성일지 모른다는 추축만 하였을 뿐이다.
김미량 시인은 자신을 소개하는 시 <미량>에서 자신이 어떤 맛인지 가늠할 수 없는, 꽃밭에 누운 꽃으로 비유하며 자신은 미량의 독성이 함유되었으니 조심하라는 자기방어기제의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지만, 자신의 입술은 누군가를 환영한 적 없다고 말하면서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천연덕스럽게 트림을 하는 여자임을 밝힌다. 트림은 생리현상이지만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성에게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열 숟가락쯤의 독을 추가하면 여우처럼 자신이 변할 수 있을까 상상하거나 한 숟가락의 상상의 독으로 얼마나 많은 늑대를 길렀는지 말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런 그녀의 시편들 중에 오늘 내가 추천하는 시는 그녀의 시집 표제 시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를 소개한다. 신에게 있어 인간은 한낱 종이접기의 조화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 그 존재론적 슬픔은 근원적 결핍감에서 시작되며, 그 슬픔은 시인 자신에 대한 존재의 성찰을 통해 완성된다.
꽃은 세상에 오기 전
작은 색종이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녁이면 신과 함께
형형색색 꽃을 접었다
말없이 동그란 탁자에 마주 앉아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를
맨 처음 제비꽃으로 접어주셨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신의 무릎에 앉을 수 있었다
(당신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떠나오던 날
신은 분홍색 분꽃을 접어 손바닥에 올려주셨다.
어른이 되어
누군가의 손바닥에 분꽃을 올려놓으면
그 사람은 겨울에 죽는단다
신의 부탁으로
사람들에게 꽃을 알리러 세상에 왔다
걸어오는 꽃은 고백처럼 잘 보이고
쓰러진 꽃들은 기도처럼 일어났다
목마른 꽃을 위해 빗소리를 틀어 두었다
방향을 잃은 꽃들은 새로운 기억으로 더 붉어지고
어젯밤 꿈에
신의 무릎에 앉아 그날처럼 제비꽃 오백 장을 접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전생은
믿거나 말거나 다 끝난 이야기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저녁에 잠든 꽃을 찾아갔다
너는 알고 있지?
그때 나는 주황색이었니 보라색이었니
그때 나는 살았니 죽었니
가까이하면 불행해진다는 분꽃을 잊고 살다가
가을에 나를 부르는 꽃이 수상해
당신에게 그 꽃을 따다 주었다
신의 예언처럼 크리스마스에 죽은 사람
꽃과 나와
신의 거리가 분간되지 않는다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전문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다. 공간과 시간 속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자기만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살아간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자신의 존재를 잊고 비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시 <신의 무릎에 앉은 적이 있다>에서 그녀는 꽃은 세상에 오기 전 작은 색종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신에게 있어 인간의 존재는 단지 종이접기처럼 허무한 존재임을 말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신을 통해서 인간은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음을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 인간이 신을 찾게 되거나 만나게 되는 경우에는 죽음을 가까이하였을 때 신에 의지하게 된다. 아마도 그녀는 열두 살이 되었을 무렵 신의 무릎에 앉을 수 있는 경험을 한듯하다. 신은 종이 꽂을 접듯 쉽게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그녀는 신으로부터 다시 생명을 받아 사람들에게 꽃의 의미 즉 인간의 삶을 알리려 세상에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꽃은 그 생명이 매우 짧은 존재이다. 더욱이 꽃들 중에서 분꽃은 저녁에 피었다 아침에 지는 지속성 매우 짧은 꽃으로 인간의 삶이 종이꽃처럼 허무함을 얘기하고 있다. 분홍색의 꽃을 누군가의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그해 겨울에 죽는다고 말한 것은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인간은 저마다 특유한 빛의 오로라를 지닌 것처럼 저마다 주어진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형형색색의 꽃들은 그 생명이 짧고 유한하다. 다만 방향을 잃은 꽃들은 새로운 기억으로 붉어질 뿐임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녀는 다시 신의 무릎에 않아 제비꽃 오백 장을 접는 꿈을 꾸면서 그 꿈은 아무도 믿지 않는 전생의 이야기이며 믿거나 말거나 운명은 이미 예정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괴로움에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잠든 꽃을 찾아가 너는 알고 있느냐고 묻거나 자신이 전생에서 무슨 색의 꽃이었는지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정체성을 확인하지만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뿐이다.
시인의 예감은 불현듯 찾아온다. 가까이하면 불행해진다는 분꽃을 잊고 살다가 모든 운명은 이미 정해진 듯 불현듯 찾아온다. 어느 날 자신을 부르는 꽃이 수상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따다 주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크리스마스에 죽은 것은 신의 예언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고 존재의 분열과 부정성, 상호 모순으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간은 존재론적인 슬픔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꽃과 나와 신의 거리가 분간되지 않는다고 한 시인의 말은 무슨 뜻일까? 김미량의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닌 진정한 출발의 시작으로 생각해야 한다. 시인은 인생의 긴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도전뿐만 아니라 삶의 존재성과 자아 정체성을 확인하며 노래하고 있다. 그녀는 결국 신과 인간의 거리를 분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낀 것은 신과 꽃과 인간이 동일체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슬픔의 모든 현상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상(無常)의 법(Anicca)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게 된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게 된다면 수동적인 삶으로 변하여 존재하기 어렵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괴로움이나 슬픔을 없애는 길, 즉 무상(無常)에서 무아(無我, 자기 부재, anatta)의 경지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밖에 없으며, 무상(無常)에서 무아(無我,)로 그 삶을 완성하는 과정이 구도의 길이자, 예술이나 문학이며 시라고 생각한다.
김미량 시인은 자기성찰의 과정에서 분꽃이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의 영속성과 자아에 대한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고, 삶과 죽음의 망상에서 벗어나게 되어 삶에 대한 보다 진지한 참여를 가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의 부탁으로 꽃을 알리러 세상에 온 여인, 김미량 시인은 허무와 절망을 극복하였기에 죽음조차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詩를 노래하는 이유이다.
2023.12.28/김승하시인/kimseonbi
김미량 시인,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2009년 [시인 동네]로 등단 14년 만에 달아실 출판사에서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