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
조지 오웰의 에세이 ‘정말, 정말 좋았지’는 오웰 선생이 8살 때부터 13살까지의 예비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중편 소설 형식으로 쓴 자서전인 글이다. 내가 보기에는 오웰 선생의 다른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고백한 것처럼,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 특히 예비학교의 교장인 ’삼보‘와 그 사모인 ’플립‘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욕망에서 ‘정말, 정말 좋았지’를 쓴 것이다. 여기에는 오웰이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걸 알게 해주는 묘사가 쉼 없이 이어지다가, 중간중간 해학의 여유가 빛을 발한다.
오웰은 ‘삼보’ 및 ‘플립’과 같이 생활하면서 느낀 점을 뒤끝 있게 묘사한다. “그 모든 것들을 겪는 내내 마음속 한가운데 결백하게 남아 있는 내면의 자아가 있었으니, 무엇을 어떻게 하든 자신의 진심은 증오뿐임을 아는 자아였다.” 이 얼마나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섬뜩한 문구인가?
계속해서 스코틀랜드 숭배 문화의 진짜 이유는 대단한 부자라야 그곳에서 여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2022년 여름에 엘리자베스 2세가 스코틀랜드 어느 별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보도가 겹쳐지며, 아직도 영국의 상류층과 상위 중산층의 스코틀랜드 숭배 문화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웰은 자신의 예민한 통찰력으로 자신에게 적용되던 사회적 기준의 부조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다. “내게 아버지는 마땅한 소양을 갖추거나 응당한 감정을 느끼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옳은 것과 가능한 것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문장은, 오웰이 자신의 뇌리에 불쾌한 사실을 차곡차곡 쌓은 후에,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엮어서 인생의 지혜로 빚어내는 능력마저도 출중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오웰의 아버지는 당대 중산층 남성에게 기대되는 교양적 태도나 정서를 보여주지 못했는데, 그것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 계급적 한계 때문이었다. 오웰은 이를 통해 ‘옳은 것’과 ‘가능한 것’이 맞물리지 못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된 것이다.
옳은 것과 가능한 것
옳은 것은
저 먼 별빛처럼
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고
가능한 것은
발밑이 흙처럼
무겁게 그를 붙잡는다
아버지의 침묵에서
그는 배웠다
고개를 떨구는 법을
옳은 것과 가능한 것
결코 만나지 않는 두 길
그 사이를 걸으며
그는 깨닫는다
삶은 언제나
균열 위에서 흘러가는 것임을
나는 ‘정말, 정말 좋았지’를 읽으면서, 내 학창 시절을 회고한다. 나의 초딩 시절과 중딩 시절은 루틴 한 생활의 연속이라서 특별한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고딩 시절에는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 기억에 또렷하다.
나는 고딩 시절, 학교 연합 동아리에 가입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단적인 동아리 활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했고, 그 동아리의 창립 기념일에 연극 무대에서 ‘러브스토리’의 남자 주인공인 올리버 역을 맡았다.
올리버의 마지막 대사인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 대사는 대부분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번역되지만, 나는 이 번역에 동의하지 않는다.
영화 ‘러브스토리’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올리버의 연인인 제니퍼가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나서, 올리버가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올리버에게 “I’m sorry!”라고 말하며, 올리버를 위로한다. 그때 올리버가 아버지에게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나는 이 대사를 “사랑이란 불행으로 끝나더라도, 결코 안 됐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싶다.
사랑이란
사랑이란
미안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의 상처를 아는 것
사랑이란
불행으로 끝나더라도
안 됐다 말하지 않는 것
사랑이란
끝내 사라질지라도
후회 없는 추억을 남기는 것
사랑이란
늘 지금 이 순간
같이 숨 쉬는 것
30여 년이 흘렀지만, 동아리 친구들을 지금도 가끔씩 만난다. 그 자리에서 각자 기억 저편의 추억 조각을 꺼낸다. 그 추억 조각은 신기하게도 퍼즐처럼 아름다운 한 편의 그림으로 윤색된다. 완성된 퍼즐 그림을 들여다보면, 나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인공 페리가 된 것 같다.
결국, 나의 고딩 학창 시절은 동아리의 추억 덕분에 나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자신의 학창 시절 우울함을 구구절절이 설파하고 있는 오웰보다 살짝 우월함을 느낀다. 그리고 새삼 추억의 퍼즐 조각을 같이 맞출 수 있는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는 왜 쓰는가:조지 오웰 지음/이한중 옮김/한겨레출판/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