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의 무게

낭만 과학

8월 하순에 시작된 100일의 '군산 프로젝트'는 피날레로 향하고 있다. 나는 100일 동안 6번 군산을 방문하기로 예정됐다. 군산으로 처음 출장 갔던 날은 유난히도 더웠다. 나는 곧 가을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긴 셔츠를 꺼내서 입었다. 7시 40분경에 케이티 엑스를 타고 갈 때만 해도 나는 무척이나 설레었다. 익산에서 새마을호 기차로 환승하여 군산에 도착할 때 즈음, 태양은 군산의 공기를 가열하기 시작했다.


태양이 내 머리를 지나갈 때가 되어서야, 나는 김칫국을 너무 일찍 마셨다는 것을 직감했다. 야구의 도시로 엄청난 기대를 안고 군산 시내를 배회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긴 셔츠를 선택한 순간을 비극으로 몰아갔다. 그전에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짧은 시간 동안 군산에 머물렀던 적은 있었지만, 여유롭게 산책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군산이라는 도시의 첫인상에 특별함은 없었다. 그냥 지방 소도시에서 느껴지는 한가함 정도만 있었다.


하릴없이 100일이 흘쩍 지나갔다. 이제 마지막 출장을 준비하고 있다. 100일의 시간 동안에 여름을 지나, 가을이 잠시 동안 내 곁에 머물더니, 매정한 겨울은 어느덧 코앞까지 와버렸다. 나는 100일 전과 동일한 시간에 군산 출장을 준비하며, 집을 나선다.


여명의 어스름한 거리를 걸으며, 매서운 강추위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순간, 100일의 무게가 내 머리를 짓누른다. 지하철의 개찰구를 통과하는데, '1240'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 지하철에도, 조조할인이 있구나. "이젠 주말의 명화 됐지만/나는 가끔씩 그리워져요/풋내 가득한 첫사랑"


언제나 기차역에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공항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아무래도 공항은 한국을 떠난다는 부담감에 어르신들은 드물게 이용하는 것 같다. 케이티엑스는 용산역을 출발하여 한강철교를 무심히 달린다. 에스알티는 터널을 출발해서, 동탄까지는 지상으로 나가지 않아서 그런지, 왠지 지하철을 타는 기분이지만, 처음부터 도심의 풍광이 내 뒤로 담박질 치는 케이티엑스가 더 좋다.


이 거대한 쇳덩어리 기차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나는 9살쯤 처음으로 기차를 탔던 기억이 있다. 광주에서 서울 올라갈 때 새벽 기차를 탔었다. 대학에 들어온 후에, 광주를 내려갈 때는 주로 고속버스를 탔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에 2년 동안, 대전으로 케이티엑스를 타고 통근했다. 거의 800번 정도 탄 셈이다.


케이티엑스가 광명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 칸에는 빈자리는 없다. 다들 어디로 갈까? 예전에는 옆에 앉은 승객에게 말도 걸고 했던 거 같은데, 요즘은 완전히 대화가 실종돼버렸다. 나 자신도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부터 우선 선택한다. 이것도 선진국이 돼 가는 경향인가?


광명을 지나니 창문 커튼 사이로 논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밭에는 이미 서리가 내려앉아 있다. 중등 지리 시간에 배웠던 무상기일이 생각난다. 서리가 내리지 않는 날이 200일 이상인 지역의 한계가 중요했지만, 요즘은 비닐하우스와 과학의 힘으로 그 구분은 의미가 퇴색됐다. 하긴 이 추운 날에도 나는 어제 딸기를 먹었다. 창 왼쪽에서 빠알간 태양이 나를 따라오며, 내 눈으로 광선을 발사하고 있다. 케이티엑스의 주로는 직선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중간중간에 터널을 반복적으로 만난다. 금방 보였던 실개천은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진다.


과연 100일의 무게가 무얼까 생각해 본다. 내 기억에 첫 번째 출장 때는 해가 6시 전에 떴었다. 그런데 오늘은 7시 반이 지나서야 태양이 꿈틀거린다. 어쩌면 100일의 무게는 태양이 1분씩 늦게 뜨는 게 누적된 것이 아닐까? 하루에 단 1분씩,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미세하게 늦어지는 태양의 걸음이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진 변화를 이제야 실감하고 있다.


이 1분의 미세한 변위가 100번 반복되면, 기온은 30도를 내려놓고 영하 10도를 들여오며, 나뭇잎은 녹음을 벗어던지고, 바람은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드러낸다. 그러니 100일의 무게란 마치 모래시계의 알갱이처럼, 하루 1분의 가벼운 변화가 축적되어 만든 시간의 지층이다.


그렇다면, 태양이 동지를 지나 하지로 나아가면, 세월의 무게를 덜 느낄까? 동지에서 하지로 가는 길은 무게를 더는 여정이길. 동지를 지나면 밤은 여전히 길고 차갑지만, 그 어둠은 더 이상 쌓이지 않는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빛의 온기가 증발시키듯 어둠은 가장자리부터 희미해지고, 겨울의 두터운 질감은 공기 속에서 조금씩 휘발될 것이다.


이 휘발은 갑작스러운 소멸이 아니라, 수증기가 되는 물처럼 서서히 가벼워지는 이동이다. 그래서 하지로 향하는 태양의 여정은 빛이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휘발되는 과정이다. 햇볕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단지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어둠의 무게를 서서히 내려놓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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