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반도체
우리가 공인인증서를 보관하는 USB 메모리는 플래시 메모리로 불린다. 이러한 플래시 메모리에는 일반적인 트랜지스터의 게이트 절연막 안쪽에 플로팅 게이트(Floating Gate)가 형성된다. ‘플로팅’은 문학에서는 물에 떠 있다는 의미를 담은 ‘부유하는’으로 번역된다. 반면에, 전자공학에서는 ‘어디에도 전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래서 나는 플로팅 게이트를 ‘고립된 전극’이라 부른다.
보통의 메모리에서 전류가 흐르다 멈추면, 데이터는 손상된다. 전자들은 전류 패스를 따라 흘러가고, 전원이 꺼지면, 전자들이 사라지면서, 데이터도 함께 휘발된다. 그런데 고립된 전극은 게이트 절연막으로 사방이 봉인된 작은 공간이다. 전자는 이 안으로 터널링이라는 비밀 통로로 들어오지만, 한 번 들어오면, 나갈 문이 없다. 전원이 꺼져도, 게이트 산화막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전자를 가둔다. 그래서 데이터는 휘발되지 않는다.
고립된 전극에 갇힌 전자를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필요한 것은 강한 전기장, 게이트 산화막을 뚫을 듯 말 듯한 팽팽한 긴장이다. 전자는 문이 열려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게이트 산화막이라는 벽이 살짝 얇아져 터널링이라는 틈으로 스며들 듯 빠져나온다.
플래시 메모리라는 이름은 우연이 아니라, 그 태생의 성격에서 비롯됐다. 플래시는 번쩍이는 빛, 순간적으로 어둠을 가르는 섬광이다. 플래시 메모리는 보통의 메모리 방식과 달리, 아주 짧은 순간, 강한 전기장으로 데이터를 쓰고 지운다. 그래서 이러한 전기장은 천천히 스며드는 비가 아니라, 하늘을 가르는 번개에 가깝다.
번개를 가한다는 건 높은 전압을 잠시 건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숫자가 커진 전압이 아니다. 의미가 전혀 다른 전압이다. 전류는 흐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봉인된 공간에 걸린 긴장, 게이트 산화막을 가늘게 흔드는 힘이다.
이러한 번개 전기장은 게이트 산화막을 부수지 않는다. 대신 게이트 산화막 벽을 얇게 만든다. 그리고 전자는 문이 열려서가 아니라, 확률에 밀려 스며든다. 그래서 플래시 메모리의 쓰기와 지우기는 지속이 아니라 순간이다. 오래 비추는 햇빛이 아니라, 짧게 치는 번개, 찰나의 섬광. 전압은 데이터를 태우지 않고, 위치만 바꾼다. 플래시 메모리는 전류로 저장하지 않고, 전기장으로 저장을 설득한다.
그런데 번개 전기장이 걸리면, 게이트 산화막이라는 바다에 순간적으로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릴까? 모세의 기적에서는 바다가 갈라진다. 사람들은 모세의 기적 길을 보고, 의지를 가지고 건너간다. 게이트 산화막이라는 바다는 갈라지지 않는다.
번개 전기장이 걸리더라도, 게이트 산화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바다는 마르지 않는다. 그 대신 바다의 간극이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얇아진다. 그 순간 전자는 ‘길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건너도 될 것 같다는 확률에 떠밀린다.
모세의 백성은 건널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게이트 산화막에 봉인된 전자는 믿음도, 두려움도 없이 터널링이라는 확률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플래시 메모리 출애굽에는 환호도, 노래도 없다. 여기에는 오직 통계만 있을 뿐이다.
번개 전기장이 사라지는 순간, 게이트 산화막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깊이로 돌아온다. 길은 남지 않고, 흔적도 남지 않으며, 돌아올 방법도 사라진다. 모세의 바다는 기적으로 기록됐지만, 게이트 산화막 바다는 결과만 남긴다.
플래시 메모리 출애굽은 영원히 반복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횟수를 세며, 제한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이벤트다. 탈출이 반복될수록 게이트 산화막 벽은 조용히 닳아간다. 한 방에 많은 전자들이 탈출할수록, 게이트 산화막 벽은 더 빨리 상처를 입는다.
봉인된 전자를 탈출시킬 때마다, 게이트 산화막은 번개를 맞는다. 산화막 벽은 무너지지 않지만, 미세한 균열이 남고, 그 균열은 다음 번개를 더 아프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출애굽이 반복될수록, 정확해지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워진다.
결국 출애굽이 빈번해지면, 게이트 산화막은 여전히 서 있지만, 더 이상 완벽하지 않다. 봉인된 전자가 새어 나오고, 하나와 영의 경계가 흐려진다. 게이트 산화막은 데이터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준다.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은, 어딘가 조금씩 닳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플래시 메모리는 저장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희생의 기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