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편집
2025년 12월 마지막 월요일 문학 싸롱의 송년회에 참석한다. 우리는 매달 마지막 월요일에 모여, 다 같이 읽은 한 권의 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12월에는 올 한 해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책의 문장을 문싸 친구들에게 읽어주기로 했다.
나는 ‘스토너’에서 제일 맘에 드는 문장을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한 순배가 돈 후에, 내 옆 친구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문학 싸롱에 참석한 이래, 도대체 왜 문학이 필요한지 아직도 도통 모르겠다.” 순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리가 멍했다.
이 글은 그가 던진 파격적인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문학의 힘은 개념을 건네는 데 있지 않고, 이야기를 건네는 데 있다. 주장 대신 서사를, 정의 대신에 메타포를 건넨다. 나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 “다른 사람을 애틋하게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대신에, 유행가 가사인 “눈물의 씨앗”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야기는 정보보다 느리지만,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사실은 반박할 수 있지만, 이야기는 떼어낼 수 없다. 한 번 마음속에 훅 들어온 이야기는 언제든 다른 순간에 되살아나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문학은 교훈을 싣지 않고, 삶의 무게를 싣는다. 선택의 망설임, 이미 지나가 버린 회한의 앙금, 말하지 못한 감정의 잔향. 이것들은 논리로 전달되지 않고, 이야기로만 건너온다.
이야기의 힘은 독자에게 해석을 맡기는 데 있다. 작가는 길을 제시할 뿐, 도착지를 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도, 누구는 위로를, 누군가는 불안을, 누군가는 자신의 과거를 만난다. 문학은 “이렇게 생각하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이런 삶이 었었다.”라며 속삭인다. 이 속삭임은 독자의 삶에 닿는 순간, 그 개인의 사유에 녹아들 뿐이다.
그래서 나는 ‘정언명령’보다 ‘피노키오’를 더 좋아한다. 정언명령은 옳음을 말하지만, 피노키오는 옳아지려 애쓰는 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언명령은 우리를 이미 완성된 인간으로 가정하지만, 피노키오는 우리를 되어가는 존재로 그린다. 넘어지고, 속고, 이용당하고, 그럼에도 다시 걸어간다.
문학은 명령보다는 이야기를, 규칙보다 사례를, 완결보다 과정을 전한다. 우리는 정답으로 변하지 못하고, 시간을 두고 변하는 존재다. 나는 명령받은 선보다 스스로 터득해 가는 선을 더 신뢰한다. 문학은 우리의 이런 선택을 조용히 지지한다.
우리가 이런 문학에 익숙해지면, 우리의 삶도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문학에 오래 머물면, 삶은 더 이상 시간의 나열이 아니라, 서사로 숨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우연처럼 느껴진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왜 이 사람을 만났는지, 왜 하필 이 순간에 상처를 입었는지. 삶은 불공평하고, 설명되지 않으며, 때로는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눈이 생기면, 우리는 묻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 “이 인물은 왜 여기서 흔들릴까?” 문학은 삶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맥락을 준다. 고통은 삭제되지 않지만, 고립되지 않는다. 어느 인물도 한 장면만으로 규정되지 않듯, 우리 역시 한 번의 실수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감각을 천천히 길러준다.
이야기로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운명을 합리화하는 일이 아니다. 아직 쓰지 않은 다음 문장이 남아 있다는 믿음이다. 인물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서사는 언제든지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조용한 희망이 남아 있다. 문학은 우리에게 삶은 해설서가 아니라, 초고에 가깝다고 말한다. 지워지고, 덧붙여지고, 어색한 문장이 남아 있어도, 끝까지 가볼 가치가 있다고.
그래서 문학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더 관대해진다.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의 삶에도. 우리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왜 이런 인생이 되었을까?” 대신 이렇게 묻는다. “이 이야기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저 사람의 인생은 어디에서 반전이 등장할까?”
그리고 우리의 삶을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이야기하는 화자는 누구든지, 자신을 주인공으로 그릴 수 있다. 이야기에서 화자는 왕일 필요도 없고, 영웅일 필요도 없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라면, 누구든 자신을 주인공으로 놓을 수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타인의 시선으로 넘기지 않는 사람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비극이 되기도, 성장 소설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에는 불완전함이 살아 있다. 객관적인 진실보다 체감된 진실이 우리의 삶을 더 정확히 말해준다.
삶을 이야기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중심에 내가 서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다만, 적어도 내 이야기 안에서만큼은 나를 배경으로 밀어내지 않겠다는 태도다. 문학은 우리에게 삶이 설명될 수는 없어도 서술될 수 있다는 권리를 부여한다. 우리가 이 권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자기 삶의 변두리에서 천천히 중심으로 걸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