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포의 오묘함

창작 편집

메타포는 어원적으로 들여다보면, 초월(meta)해서 무언가를 전달(phor)하는 것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그가 선택한 단어에 실어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가 선택한 단어는 미디어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메시지는 완성된 상태로 도착하지 않는다. 의도는 출발점에 남고, 도착하는 것은 가능성이다.


단어는 저장 장치가 아니라, 전달을 시도하는 사건에 가깝다. 의미를 담기보다는 의미가 생겨날 조건을 싣고 간다. 그래서 동일한 문장일지라도 개인마다 다른 항구에 닿는다. 작가는 말한다. “이 배에 내가 본 풍광을 실었어.” 그러나 독자는 자기 기억의 날씨로 그 배를 맞이한다. 파도가 잔잔하면 서정이 되고, 폭풍이면 고백이 되며, 안갯속에서는 질문이 된다.


그래서 문학의 전달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작가는 단어를 매개로 자신만의 코드를 던지고, 독자는 그 코드를 자기 삶의 수신기로 해독한다. 그 순간, 메시지는 더 이상 작가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독자의 것도 아니다.


단어는 투명하지 않다. 결을 가지고 있고, 역사를 가지고 있어, 사용된 횟수만큼 닳아 있다. 그래서 작가는 늘 가장 정확한 단어가 아니라,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단어를 고른다. 결국 문학에서의 전달이란, “이해시켜 주겠다”가 아니라, “여기까지 와줄 수 있겠는가”라는 조용한 초대다.


작가의 메시지는 실려 있지만,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단어는 다리이고, 작가가 선택한 단어를 받아들여 건너는 일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문학은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가 아니라, 작가의 메시지와 독자의 해석이 만날 수 있는 마당이다.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메타포는 ‘국화와 칼’이다. 국화는 일본의 순종적인 면을, 칼은 반항적인 면을 전달한다. 그런데 국화는 단순한 순종을 뜻하지는 않는다. 국화는 절제된 질서다.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모양으로 핀다. 그것은 스스로를 틀 안에 가두는 미학이다.


칼 역시, 단순한 반항의 상징은 아니다. 칼은 충동이 아니라 의무다. 분노보다 규범에 가깝고, 자유보다 책임에 가깝다. 칼을 든다는 것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드는 것이다. 그래서 칼은 폭력이라기보다 결단의 형식이다.


이 메타포가 강렬한 이유는 별도로 존재한다. 국화와 칼은 모순적이면서도 양가적인 우리의 모습을, 묘사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국화와 칼은 모순을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조화시키지도, 봉합하지도 않는다. 그저 말한다. 우리 안에는 국화와 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온순함은 잔혹함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순종은 반항을 제거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둘은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처럼, 같은 몸 안에서 숨 쉰다. 꽃을 오래 지켜본 눈이, 칼의 날을 가장 정확히 안다. 국화와 칼이 직접적인 이유는 감정도, 역사도, 이론도 거치지 않기 때문이다. 국화 하나, 칼 하나. 독자는 해석하기 전에 이미 느껴버린다.


그리고 국화와 칼의 느낌은 불편하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손으로 잔혹한 선택을 할 수 있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이 메타포는 설명보다 잔혹하고 비판보다 정직하다.


국화와 칼은 타협의 문장이 아니라, 공존의 문장이다. 순응과 반항, 온순함과 잔혹함이 같은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문학은 그 탁자에서 아무것도 치우지 않는다. 그저 이것을 읽으려는 독자에게, 언제든지 불을 켜고, 보여줄 뿐이다.


이것이 메타포의 힘이다. 해석을 통과하지 않고 감각을 통과한다는 점. 이해는 언어의 영역이지만, 직감은 생존의 영역이다. 그래서 메타포는 재빠르다. 번개처럼, 훅. 그 뒤에야 독자는 천천히 말로 따라간다. 왜 불편했는지, 왜 마음이 갈라졌는지, 왜 이 문구가 오래 남는지.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메타포는 이미 우리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문학은 먼저 설명하지 않는다. 먼저 흔든다. 몸이 반응하고, 마음이 떨리고, 그다음에야 사유가 고개를 든다. 직감이 먼저 들어오는 문장은 설득하지 않는다. 침투한다. 그리고 그 침투가 있었기에 해석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자기 고백이 된다. ”왜 나는 이 문장에서 이렇게 느꼈을까?“ 이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문학은 이미 독자에게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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