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편집
나에게 고전이란, 공간의 간극을 넘어서, 시간의 무게를 이겨낸 책이다. 그렇다면, 공간의 간극과 시간의 무게 중 어떤 게 더 중요할까? 공간의 간극은 유명세로 단숨에 건너뛸 수 있지만, 시간의 무게는 유명세로도 가볍게 극복될 수 없다.
유명한 작가는 번역되고, 소개되고, 커리큘럼에 오른다. 국경은 출판으로, 언어는 주석으로 극복된다. 공간의 간극은 사회가 대신 다리를 놓아준다. 그러나 시간은 아무도 대신 건네주지 않는다. 시간은 묻는다. 문장이 아직도 아픈가, 여전히 부끄러운가, 다시 선택하게 만드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도, 조용히 책장 깊숙이 가라앉는다.
고전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썼는가?”가 아니라, “작가가 사라진 뒤에도, 그의 문장이 혼자 걸을 수 있는가?”이다. 명성은 첫 만남을 보장하지만, 재독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고전의 판단 기준에서는 시간의 무게가 더 중요하다.
시간은 거품이 잔뜩 낀 찬사를 깎아 내고, 시대성으로 포장된 표피를 벗겨 내며, 마침내 핵심만 남긴다. 그 핵심이 여전히 인간을 향해 열려 있을 때, 그 책은 고전이 된다. 유명한 작가는 공간을 건너오지만, 위대한 문장은 시간을 통과한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박물관에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 매번 다른 현재에 불려 나와, 다시 심문을 받는 일이다. 그 다양한 심문을 끝내 견뎌 낸 문장만이, 시간의 무게를 이기고, 매번 다른 현재의 독자를 자기편으로 만든다.
나에게는 마음속 고전으로 간직하고 싶은 현존 작가의 작품이 있다. 바로, 한강의 ‘소년이 온다’이다. 한강은 나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렇지만 한강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숙한 자세로 우리의 삶에 천착하고 있다.
나는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 발표 직후에, ‘소년의 온다’를 읽기 시작했다.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한 달 안에 다 읽지 못했다. 만약 나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을 외면했던 미안함이 없었다면, 아직도 완독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매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쉼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다 읽고 나서, 문득 “나는 읽기만 했어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한강은 어떻게 탈고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5년 다시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두 번째 읽을 때도, 눈물이 앞을 가려, 한 번에 10페이지를 읽는 것은 포기했다. 역시나 한강의 문장은 너무 씁쓸했다. 에스프레소에 3 샷을 추가한 맛이랄까? 한강을 대학 다닐 때 만났다면, 나는 한마디 말도 못 걸었을 것이다.
아직도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읽으면, 정수리를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이 가해진다.
“인간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철학적 정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뒤이어 더 무거운 질문이 연속된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인간성은 본능도, 본성도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이 문장의 가장 무서운 점은 악을 괴물로 그리지 않은 데 있다. 약탈과 살인은 특별한 자의 일이 아니라, 상황이 허락할 때, 쉽게 발현될 가능성에 놓여 있다. 반대로 이타성과 용기도 영웅의 자질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에게서 솟아나는 능력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 문장은 군중 속에 설 때마다, 언제든지 다시 읽히게 된다. 한강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게 말한다. 인간은 언제든 인간이 아닐 수 있고, 그것을 막아주는 것은 제도도, 명분도 아니라, 각자의 선택뿐이라고.
다시 묻는다. ‘소년이 온다’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까? 이미 한 발은 올라섰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반열은 대리석 위가 아니라, 아직 식지 않은 기억의 바닥 위에 놓여 있다. 고전은 시간이 만들어 주는 침묵 속에서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는 아직 침묵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
작가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작품은 늘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찬사도, 비판도, 오해도, 작가의 호흡과 함께 움직인다. 그래서 평가는 뜨겁고, 냉정해질 수 없다. 운명한 뒤에야, 작가는 말하지 않고, 시대와 더 이상 협상하지 않는다. 그때 비로소 작품은 홀로 서서 시간을 견디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시간의 무게를 견뎠는지는, 작가가 떠난 뒤에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무게를 견딜 자격을 가졌는지는, 이미 그의 문장 속에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