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로 지키는 제목

창작 편집

제목에도 저작권이 존재할까? 대부분의 경우, 제목에는 저작권이 없다. 제목은 집 앞에 붙인 문패처럼, 창작물을 부르는 이름일 뿐, 그 자체로 창작적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작권은 짧고 관용적인 표현이나 창작물의 내용을 대표하는 단어는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식별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서적의 제목, 노래의 제목, 영화의 제목은 대개 저작권으로 보호되지 않는다.


만약 제목 하나하나에 저작권이 허락된다면, 제목은 금방 고갈될 것이다. 이런 구조를 이해하는 창작자는 가장 짧은 시에 제목을 붙여서, 제목 여러 개를 입도선매하듯 선점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것처럼, 저질의 저작물이 창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절벽에 먼저 올라간 사람이, 뒤에 언덕을 오르려는 사다리를 걷어차는 형국이 된다. 그래서 지금의 저작권처럼, 제목에 저작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후배 창작자의 저작 활동에 바람직할 것이다. 저작의 작품 내용은 보호하지만, 그 작품의 입구인 제목은 누구에게나 개방하는 것이 저작권의 취지일 것이다.


2022년 4월에는 공전의 히트 드라마가 ‘나의 해방일지’라는 타이틀로 등장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불안한 젊은이들이 “하루 중 짧은 순간이라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는 대사를 남기며, 각자의 방식으로 해방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해방일지’는 이 드라마의 내용을 관통하는 한 단어다. 우리의 저작권법이 ‘나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에 저작권을 허여 했다면, 후속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고, 2박 3일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 아버지와 주변 인물을 관조하며, 되뇐다. “아버지가 떠난 뒤에야 아버지의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외동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아버지의 겉모습만을 바라보며, 그가 살아왔던 사정은 외면했었다. 저자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긴 말을 들으며, 아버지에 대한 오해에서 해방된다. 이 소설에서도 관통하는 한 단어는 ‘해방일지’이다.


두 작품에서 ‘해방일지’는 입구이자, 지름길이다. 제목을 무주공산으로 두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나는 ‘나의 해방일지’를 맛볼 천재일우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이미 떠나버린 나의 아버지를 회고했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이해는 늘 늦게 온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엄청난 감동을 받은 나는, 유튜브에서 우연히 ‘나의 해방일지’를 만났다. 처음에는 ‘나의 해방일지’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본떠서, 만든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들여다보니, ‘나의 해방일지’가 선배이고,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후배였다. 그렇지만, 선배와 후배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오히려 두 작품이 건재하여, 서로의 감동을 증폭시켰다.


나는 동일한 제목의 노래를 다양하게 듣고, 동일한 제목의 소설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읽으면, 여러 가지의 감동이 조화를 이루며,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 단언한다. 제목은 공유되고, 작품의 내용은 각자의 상상을 표현한다면, 언어가 마르지 않아서,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우리 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소설이나 영화가 연작이나 시리즈로 등장하여, 브랜드처럼 쓰인다면, 상표법의 영역에서 보호하면 된다. 이병주가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된다”라고 말했듯이, 이때의 제목은 햇볕과 같아서, 소비자들의 뇌리에 역사처럼 각인된다. 그렇지만, 보통의 제목은 그의 다른 대구,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처럼, 달그림자로 내 버려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해방일지’를 태양처럼 취급했다면, ‘해방일지’가 닿는 순간, 환하게 소유의 경계를 밝힐 것이지만, 제목에 그 빛을 쏟아부은 결과, 창작의 들판은 ‘해방일지’의 양달만큼 좁아진다. 제목의 언어를 독점한 결과, ‘해방일지’ 양달의 몇 배 영역에도 그늘이 드리운다. 창작 활동을 격려해야 할 저작권이 창작의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는 보통 저작의 제목은 달그림자로 내 버려두어, 창작의 영역이 좁아지지 않는 지금의 상태를 지지한다. 저작의 제목은 붙잡아 두어야 할 보석이 아니라, 많은 소비자가 지나가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일 뿐이다. 한 이름에 더 다양한 이야기가 새로운 방식으로 태어나 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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