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으로 스며드는 정체성

창작 편집

스트리밍 음악을 자기만의 방에서 트는 것과, 카페에서 트는 것은 구별될까? 저작권의 세계에서는 자기만의 방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창작물을 개인적으로 향유하는 행위다. 하지만 입장하는 손님들을 위해서 카페에서 음악을 트는 것은, 공연으로 취급된다. 쟁점은 ‘음원을 실제로 불특정 다수가 들었냐’가 아니고, ‘음원을 불특정 다수가 들을 수 있느냐’다. 이것을 ‘공연권’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카페는 작은 콘서트장이 되는 것이다.

나는 2006년 4월에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을 방문했다. 화사한 봄볕을 맞으며, 우리는 베니스의 정취를 맘껏 마셨다. 직사각형 광장 가장자리에 즐비해 있는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자리 긴 쪽 카페들 앞에서는 자기만의 오케스트라가 아리아를 감미롭게 연주하며, 관광객들을 유혹했다.

우리는 비발디의 ‘봄’이 달콤하게 울리는 카페를 찾았다. 나는 카푸치노를 마시며,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관객이 되었다. 계산서를 보니, 카푸치노 가격 4유로 이외에, 오케스트라 차지 2유로가 눈에 띄었다. “아, 이 애들은 오케스트라 값도 별도로 받는구나?”라는 생각에 살짝 놀랐다.

우리 사회에서는 저작권의 개념이 장착되지 않았던 1990년 초반까지는 복제된 음원을 구르마에서 염가로 판매했다. 구르마표 카세트 테이프는 A급은 2000원에, B급은 1000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이 당시에는 저작권이 없었다기보다는, 저작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저작권법은 깊숙한 책장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광통신 케이블이 급속도로 깔렸다. 우리들은 처음으로, “노래를 파일로 듣는다”는 감각을 익혔다. 소리XX는 공유의 혁신 기술이었지만, 창작자에게는 무자비한 방조의 파도였다. 우리 사회에서는 음악은 공짜라는 코드가 굳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음원을 도둑질한다는 느낌보다는 “새로운 시대를 즐긴다”는 기분에 젖어들었다.

소리XX는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큰 대가를 치르며, 아프게 배운 저작권 교과서였다. 이후 디지털 저작권 국제 협약이 갖추어지며, 우리 사회에도 저작권의 개념이 도입됐다. 지금은 스트리밍 음원이 대세가 됐다. 별도의 뮤직 장치가 없어도, 언제든지 스마트폰을 통해서, 음악의 바다로 들어갈 수 있다.

스트리밍 시스템은 우리에게 “음원에는 값이 매겨져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문제는 우리가 스트리밍 시스템에 값을 지불하면, 구독 기간에는 맘대로 음원을 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트리밍 요금은 정해진 방식으로만 음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자기만의 방에서 음원을 트는 것과 카페에서 음원을 트는 것을 구별할까? 카페에서 스트리밍 음악을 틀면, 손님들이 끌려오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카페에 들어서면, 메뉴보다 먼저 카페의 분위기를 느낀다. 이 분위기를 구성하는 것은 조명, 인테리어, 음악이 있지만, 적당한 템포의 재즈는 카페 안에 오래 머물게 하고, 흥겨운 팝은 기분을 끌어올린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카페의 음악 취향은 가장 먼저 드러나는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우리는 카페 근처를 지나다가 들리는 음악으로, 오래 머물려 책을 읽을 공간인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와도 괜찮은 장소인지, 오랜만에 술 한잔하고 친구들과 못했던 뒷담화를 맘껏 날릴 수 있는지를 결정해 버린다.

카페의 인테리어는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들여다봐야만 카페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지만, 음악은 소비자가 조용히 있어도 훅 다가온다. 인테리어는 소설 문장을 따라가듯, 재질과 배치를 해석해야 하지만, 음악은 해석하기도 전에 이미 몸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인테리어가 지성으로 읽어내는 정체성이라면, 음악은 감각으로 스며드는 정체성인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음악은, 수완 좋은 영업사원이다. 감각으로 스며드는 음악에 지불하는 가격은 카페의 분위기를 함께 디자인하는 동료에게 건네는 몫이다. 카페는 단지 커피만을 팔지 않는다. 취향을 팔고, 분위기를 팔며, 시간을 파는 곳이다. 누군가 밤을 새워 가며 만들었을 음악에 카페의 시간 속으로 흐르는 존중의 가격이 붙여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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