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편집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를 보기 위해 일찍 회사를 나선다. 낙산 성곽길 중턱에 있는 북카페 '책 읽는 고양이'를 찾아간다. 서둘러 지하철을 타러 걷는 길에는 우키요에의 날카로운 파도마저도 순식간에 얼릴 수 있을 빙점 추위가 가득하다. 동대문 역에서 내려, 성곽길을 오른다. 동장군의 위력에 한갓짐의 호사를 누린다. 간간히 뒤돌아서서, 바라보는 낙산 하늘은 내 뇌리에 가장 청명한 하늘로 자리 잡은 크라이스트처치 하늘을 밀어내고 있다. 이 서늘하면서도 맑은 하늘 한가운데 반달이 홀로 떠 있다. 오늘 보게 될 '기이한 생각의 바다'와 너무 잘 어울리는 환상의 짝꿍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예습 차원에서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의 에세이를 읽었다.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요량으로 첫 페이지를 들여다보지만, ‘김우창 선생의 글은 자본론보다 훨씬 더 어려워요’라는 네이버 댓글을 실감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선생은 까마득한 바위산처럼 느껴진다.
놀라운 점은 스승과 제자로 만난 최정단 감독이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를 21년 동안 찍었다는 것이다. 영상 곳곳에 최정단 감독의 열정과 혼이 편재되어 있다. 사람들이 속속 모인다. 20여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정면 유리창에 걸린 스크린에는 영화 첫 장면을 비추고 있다. 우리 시대의 대학자 김우창 선생의 멘트가 흘러나온다. “우리 모두는 기이한 생각의 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자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기이한 생각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기이한 생각의 바다’는 뭘까?
영화는 생활인으로서의 김우창과 끊임없이 사유하는 김우창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선생은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자폐적인 삶을 살게 된다.” 큰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가감 없이 평가한다. “아버지는 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또라이가 됐을 거에요.” 선생은 자신의 삶에서도 쉼 없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의미성에 천착한다. 오늘 본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반달처럼 독특하면서도, 모순적이다. 그래서 선생은 평생을 친구 없이 고독한 삶을 살고 있다.
영화의 대부분은 선생이 집에서 생활하는 모습과 사이사이에 사유하는 멘트로 채워져 있다. 선생은 이 집에서 40여 년 동안 살고 있으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 이 장면 사이에서, 기억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한다. “기억이란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현재를 풍부하게 하며 주체적인 지속을 보장해 주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다.”
선생에게 기억은 지금 이 순간 다시 태어나는 숨결일까? 선생은 기억을 통해 시간이 끊어지지 않도록 과거와 현재를 묶으며,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걸까? 선생은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려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다. 그렇다면 선생도 기억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품은 채로 살고 있을까?
선생은 폴 틸리히의 ‘영원한 현재(Eternal Now)’를 언급한다. 선생은 영원한 현재를 살기 위해서, 스스로 ‘자폐적인 삶’을 선택하고, 기억을 통해서 주체적인 지속을 사유하며,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추구했을까? 선생이 지금도 항해하고 있을 ‘기이한 생각의 바다’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이 영화를 10번 정도 더 보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사유하는 장면으로만 채워졌다면, 너무 무거웠을 것이다.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를 다 보고 나니, 선생이 생활하는 방식에서 당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유지하는 모습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것은 최정단 감독이 21년 동안의 피와 땀의 결실일 것이다. 선생이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유를 보여주는 것은 각자 자신만의 기이한 생각의 바다를 항해해 보라고 메시지를 던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