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존

낭만 과학

오후 하늘은 완전히 흐린 것도, 완전히 맑은 것도 아니다. 옅은 회색의 장막이 세상을 덮고 있다. 그 한가운데 태양은 또렷하지 않은 둥근 빛으로 번져 있다. 햇볕은 강하지 않지만, 힘을 잃은 듯 수그리지도 않는다. 안개인지, 미세먼지 모를 작은 입자들이 공중에 떠다니며, 빛과 어둠의 경계를 점점 모호하게 흩트린다. 한반도 전통적인 겨울 날씨는 삼한사온이었는데, 어쩌다 지금은 삼한사미가 됐을까? 예전 겨울에는 사흘은 추웠다가, 나흘은 풀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차가움과 따스함이 번갈아 오기보다는, 쌀쌀함과 답답함이 교차하고 있다.

우리가 자연을 쥐어짜 얻어낸 석탄이나 석유를 마구잡이로 땐 대가를 치르는 것일까? 석탄과 석유는 자연이 수억 년 동안 햇빛과 숲과 바다를 지층 깊숙이 눌러 담아, 천천히 봉인해 둔 선물이었다. 햇볕이 너무 강해 숲이 쓰러지던 시절, 바다가 넘쳐 생명이 잠기던 시절, 자연은 숲과 바다 생명을 땅속에 고이 접어 두었다. 이건 미래를 위해 저장된 에너지였다.

상속자는 자연이 물려준 선물을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오늘만 살 것처럼, 자연이 천천히 봉인해 둔 선물을 물 쓰듯, 남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래의 몫까지 담보로 잡아, 최대한 땡겨서 써버렸다. 상속의 순간에 너무 들떠 있었던 상속자는 고개를 들어, 잔칫집인 줄 알았던 파티장에서 뒤늦은 정산 청구서를 들여다본다.

이제는 여름 저녁에 해가 졌는데도, 낮의 열기가 대기 속에 붙잡힌 채, 날아가지 못한다. 바람이 불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밤은 변함없이 찾아오지만, 열대야는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겨울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하늘에는 뿌연 미세먼지가 가득하다. 뭉크의 명화 ‘절규’ 속 소년처럼, 얼굴을 둘러싸고, 절규하고 싶은 날씨가 이어진다.

저녁이 식지 않고, 아침이 뿌연 것은, 우리가 마구 태운 흔적일까, 남용한 대가일까? 흔적은 결과 중심적이어서, 유체 이탈이 가능한 단어다. 의도가 아니라 결과만 가리키고, 선택이 아니라 상태만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흔적은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말이라면, 대가는 끝까지 책임이 따라오는 말이다. 우리가 썼고, 우리가 누렸다면, 반드시 치러야 할 몫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대가’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듣기 싫어하면서, 가장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불의 그림자를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불의 밝기만을 계산했고, 그림자의 무게는 계산하지 않았다. 이제는 탄소 가격, 오염 비용, 건강 비용을 에너지 가격 안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에너지의 비용을 올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대가를 정확하고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 노력에는 영웅이 따로 없다. 우리 모두 전력 피크 시간을 피해 쓰는 선택, 필요 이상 밝히지 않는 조율을 실행해야만 한다.

문제는 우리만 잘한다고 해결될 수 없으며, 이웃 국가의 공조가 중요하다. 공기는 국경에서 멈추지 않고, 미세먼지는 여권을 검사받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성실히 불의 그림자를 정리해도, 바다 넘어 이웃의 굴뚝에서 나온 연기는 밤새 우리에게 건너온다. 중국 대륙에서 생성된 고기압은, 편서풍을 타고 한반도를 지나 일본 열도로 휘어진다. 그래서 미세먼지는 외교 문제가 아니라 물리의 문제이며, 우리 모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공조해야만 한다.

이게 싫으면, 뉴질랜드 남섬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에서 동서로 이웃 국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거의 유일하게 뉴질랜드 남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공기는 이웃의 선택을 거의 상속받지 않는다. 다만, 이곳도 면책 지대는 아니다. 단지 지연된 존일뿐이다. 지구 전체의 대기가 흔들리면, 그 결과가 가장 늦게 도착하는 곳이다.

지금 세대는 자연이 물려준 선물을 다 소진할 자격이 없다. 지금이라도 남용의 대가를 인지하고, 우리들이 각성하는 것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과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즉각적인 전환이다. 먼저 불편해지고, 먼저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이제는 핑계를 멈추고, 증명해야 할 때다. 나는 외치고 싶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작가의 이전글청동 투구는 용감무쌍한 전사로 변신시키는 부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