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편집
콩나물시루 같은 국중박 1층을 지나, 2층으로 오른다. 초입에 보이는 사유의 방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전시실 안에 홀로 빛을 받으며 청동 투구가 우뚝 서 있다. 불과 1미터 간극을 두고, 어둠과 고요함의 앙상블이 나를 별천지로 이끈다. 외부의 번잡함이 일순간 사라진다. 회색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청난 반전에 멍해진다. 블랙아웃이 지나가며, “손기정”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청동 투구의 표면에는 짙은 에메랄드 빛과 산화된 금속 질감이 교차하며 고색창연한 숭고미를 풍긴다. 눈이 노출되는 부위의 곡선은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다. 투구 너머로 강렬한 시선을 풍기기 위한 것일까? T자형 보호대와 뺨을 감싸는 가리개가 일체형으로 제작되어 매우 견고하고 위엄 있어 보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 정권이 자신들의 체제를 홍보하기 위해서 열을 올렸던 대회였다. 이 청동 투구는 코린토스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서, 독일 고고학자가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우승자에게 메달 외의 부상을 수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이 투구는 베를린 박물관에 50년 동안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비로소 손기정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 투구를 계속 지켜보다가, 의문이 든다. “과연 나는 이 청동 투구를 쓸 수 있을까?”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한번 쓰면, 영화 ‘아이언맨’처럼 영원히 벗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영화 ‘트로이’에서 청동 투구를 쓰면, 다들 용감무쌍한 전사로 변신하는 것이 대단히 신기했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과 권력 다툼을 하거나 브리세이스에게 뻐꾸기를 날릴 때는, 투구를 벗었다. 그의 분노를 가감 없이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청동 투구를 쓰는 순간, 그는 그리스 군의 가장 강력한 전사가 되어 적들에게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던졌다. 청동 투구는 아킬레우스에게 인간에서 최종 병기로 변신시키는 가면이었다.
아킬레우스의 가장 절친 파트로클로스는, 아가멤논과 싸운 후에 태업하고 있는 아킬레우스를 대신해서, 그의 투구를 몰래 쓰고 출전한다. 코린토스 투구는 눈만 빼고 얼굴 전체를 가리기 때문에, 적들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 청동 괴물을 마주하며 공포에 질린다. 영화에서도 아킬레우스의 투구를 쓴 파트로클로스가 등장하자마자, 트로이 군은 “아킬레우스가 나타났다!”라고 고함을 치며, 도망친다.
결국 청동 투구는 용감무쌍한 전사로 변신시키는 부적일까? 이 코린토스 투구를 쓴 전사는 자신의 두려운 표정, 망설이는 눈빛을 청동 뒤로 숨기게 된다. 개인의 약점이 가려지는 순간, 전사는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전쟁의 불사신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심리적 위약을 얻는다. 한편, 이 청동 투구는 옆을 보기 어렵게 설계됐다. 주변을 살필 수 없으니, 곁눈질로 도망갈 궁리를 할 수 없어, 오직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하게 만든다.
나는 이러한 투구를 35년 전 우리 동네 특공대에서 경험했다. 신병 교육대에서 조교들은 청동 투구를 쓴 것처럼, 빨간 모자를 눌러쓰며, 눈을 보이지 않은 채로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그들은 챙을 깊게 눌러써서 눈을 가리며, 나 같은 훈련병들이 눈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군기가 바짝 들 수 없는 기간 동안에, 나는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184일의 병역을 무탈하게 마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코린토스 투구는 손기정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1986년, 50년 만에 도착한 투구를 두고, 그는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한다. 손기정은 식민지 청년으로서 1936년 베를린에서 홀로 힘들게 마라톤 레이스를 펼치면서, 나라를 구하는 심정으로 묵묵히 달렸으리라.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용감무쌍한 전사가 자신의 투구를 신전에 바치듯, 그 역시 마라톤 우승 투구를 국가에 기증하며, 당신의 소명을 완수했다는 평안함을 얻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