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박구리가 이어주는 카멜리아

낭만 과학

하루의 끝을 포용하듯 따스하고 부드러운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려는 무렵에,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에 오른다. 안개 저편 서해로 흐릿하게 번져가는 윤슬은 감미로우면서 왠지 서글픈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살짝 우수에 젖으려는 찰나에, 직박구리가 동백나무 꽃에 쉴 새 없이 날아들며, 고요한 숲에 생명력 넘치는 지저귐을 선사한다. 나무를 열렬히 사랑하는 기획자 친구가 설명한다. “동백은 새가 꽃을 맺어주는 대표적인 조매화야.” 나는 직박구리가 이어주는 카멜리아를 넋 놓고 보고 있다.

카멜리아와 직박구리의 만남은 자연이 설계한 정교한 겨울철 생존 전략이다. 곤충은 자외선이 잘 보이지만, 직박구리는 붉은색에 매우 민감하다. 벌과 나비가 잠든 겨울, 카멜리아는 푸른 잎 사이에서 유독 짙은 선홍빛의 꽃망울을 품고 있다. 직박구리는 덩치가 커서 곤충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카멜리아는 꽃송이 하단에 진하고 풍부한 꿀을 담아둔다. 꽃을 따서 뒷부분을 빨면 엄청난 꿀물이 나오는데, 카멜리아가 사랑의 전령사를 위해 마련한 달콤한 선물이다. 직박구리는 이 고칼로리 음료를 흡입하기 위해 쉼 없이 카멜리아 꽃 사이를 누빈다.

직박구리가 깊숙이 숨겨진 꿀을 마시려고 꽃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 때, 카멜리아의 생존 지혜가 작동한다. 카멜리아의 수술은 꽃 가운데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직박구리가 부리를 집어넣는 순간, 직박구리의 이마나 부리 부근에 노란 꽃가루가 잔뜩 묻게 된다. 꿀을 마신 직박구리는 옆 카멜리아의 다른 꽃으로 날아가 다시 머리를 밀어 넣으면, 부리에 묻어있던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자연스럽게 옮겨 붙으며, 수정이 일어난다.

직박구리는 벌보다 훨씬 무겁고 힘이 세다. 그래서 카멜리아는 직박구리가 발로 딛거나 부리로 거칠게 다뤄도 꽃이 쉽게 망가지지 않도록 꽃잎이 두껍고 단단하며, 수술대도 다발로 뭉쳐 있어 튼튼하다. 카멜리아의 윤기 나는 두터운 잎은 자신의 생존뿐만 아니라, 화마를 막아내는 천연 방화벽의 역할을 아주 훌륭히 수행한다. 카멜리아 잎 표면을 보면 반짝거리는 광택이 나는데, 이는 두꺼운 왁스층이다. 이 왁스층은 잎 내부의 수분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불길이 닿았을 때 쉽게 타오르지 않게 저항하는 보호막이 된다.

행여 불이 붙더라도, 수분을 머금은 채 천천히 그을리는 정도에 그쳐 불길의 확산을 지연시킨다. 반면에 소나무는 송진과 같은 가연성 물질이 많아 불이 붙으면 폭발적으로 활활 타오르게 된다. 그래서 선운사 같은 고찰에서는 대웅전 뒤편에 카멜리아를 촘촘히 심어 놓았다. 고찰의 대웅전 뒤편의 병풍 동백나무 숲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라, 사찰을 화마로부터 지켜내는 살아있는 물의 장벽인 것이다. 기획자 친구의 세심한 설명을 들으니, 새삼 동백 숲이 더 이뻐 보인다.

나는 카멜리아 꽃 사이를 오가는 직박구리를 관조하면서, 파리스에게 세 여신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전달했던 사랑의 전령사 헤르메스를 소환한다. 황금 사과 한 알을 든 채,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샌들 탈라리아를 신고 파리스 앞에 내려앉는다. 가장 먼저, 헤라의 유혹을 전한다. “나를 선택하면, 너에게 아시아 전체의 통치권을 주겠다.” 다음으로 아테나의 선물도 전한다. “나를 찍으면 전쟁에서의 승리 명예를 주겠다.” 마지막으로 아프로디테의 속삭임을 전한다. “나를 선택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지만, 사랑의 전령사 헤르메스가 남기고 간 메시지는 결국 트로이의 멸망이라는 서글픈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헤르메스는 신들의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전달자였다면, 현대의 헤르메스는 패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정점에 서 있는 브랜드다. 헤르메스가 제우스의 특별한 메시지를 독점적으로 전달했고, 헤르메스의 제품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독점적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만, 헤르메스는 가장 달콤한 유혹을 전하며, 수신자를 파멸의 수렁으로 몰고 가는 팜므파탈이다.

헤르메스를 생각하다가 다시 직박구리를 들여다본다. 직박구리는 지금도 카멜리아 생명의 소식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면서, 수정을 돕고 있다.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생명의 전령사다. 게다가 화마로부터 우리의 신체와 재산을 지켜내는 귀중한 수호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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