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편집
최인훈의 ‘광장’에서 명준은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만 존재하는 남한의 광장과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욕망이 거세된 북한의 광장 사이에서 방황한다. 명준은 1950년 이른 봄 북한에서, 은혜를 만난다. 그러다 그해 6월 남만주 집단농장에 파견되어 은혜와 떨어지게 된다. 명준은 은혜를 생각하며, 그녀를 묘사한다.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 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했다.” 명준은 계속해서 밀실만 있고 사회적 소통 공간인 광장이 없다고 괴로워하다가 은혜를 만난 것이다. 은혜와 함께 한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은 가장 깊숙한 밀실인 동시에, 타자와 완벽하게 소통하는 가장 궁극적인 광장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소설은 첫머리에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로 시작한다. 얼핏 보면, ‘명준이 너무 지쳐서, 바다를 무겁게 뒤채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걸까’라고 생각된다. 명준은 끊임없이 번민하는 철학자다. 그가 마주하는 역사의 무게가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육중해서, 그의 영혼이 극도로 지쳐있는 듯하다. 소설을 계속 읽다 보면, ‘육중한 비늘’은 인간의 온기를 허락하지 않는 남한과 북한의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된다.
한편, 명준은 자신을 싣고 중립국으로 향하는 타고르호에서 자신이 가고 싶은 광장에서 대해서 토로한다. “환상의 술에 취해보지 못한 섬에 닿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섬에서 환상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명준이 말하는 ‘환상의 술’은 타락과 게으름이 판치는 남한의 환상과 플래카드와 구호뿐인 북한의 환상을 가리킨다. 명준은 이데올로기의 무풍지대인 환상 없는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소설 곳곳에서 ‘환상 없는 삶’이란 불가능하다는 복선이 넘쳐흐르며, 명준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한다.
명준이 가장 행복한 공간은 은혜와 단둘이 만나는 굴이다. “명준은 굴을 사령부로 가는 길에 지름길을 찾아보느라 일부러 산을 타고 넘어가다가 찾아냈다. 그런 다음부터는 어쩌다 틈이 생기면 와서 드러누웠다 가는, 그만이 아는 곳이었다.” 명준은 자신이 발견한 굴에서 은혜와 꿈같은 사랑을 나눈다. 이 굴은 명준이 말하는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을 지상에서 실현한 것으로, 외부 세계의 이데올로기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안식처다. 서글프게도, 이 현실의 굴은 영원할 수 없다.
소설의 말미에 가면, 명준은 드뎌 자신의 광장을 찾는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제 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속에 가라앉은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명준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거대한 두 무덤에서 살았다. 그동안 명준이 보았던 광장은 정치적 구호가 난무하던 잿빛 광장이었다면, 죽음의 문턱에서 마주한 푸른 광장은 어떤 경계도 없는 무한한 공간이다. 결국 이 푸른 광장에서 명준은 탁상공론의 철학자, 월북자, 포로라는 모든 사회적 꼬리표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큰 새’의 남편이자 ‘작은 새’의 아버지라는 사랑의 자아만 남긴 채, 완벽한 자유를 얻는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소설 첫 문장을 소환한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명준이 처음 본 푸르고 ‘육중한 비늘’은 결국은 큰 새 작은 새의 다른 모습이었다. 작가는 명준이 큰 새 작은 새를 은혜와 딸로 바라보게 될 때야 비로소 그것이 궁극적인 광장으로 변모할 것임을 첫 문장에 암시하고 있던 셈이었다.
명준은 거창한 국가나 당이 채워주지 못한 삶의 의미를, 은혜와 함께 한 시간, 특히 전장의 굴에서 나눈 사랑으로 채워주었기에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에서 밀실과 광장의 조화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 큰 새 작은 새가 좋아서 미칠 듯이 나는 푸른 광장에서 사랑과 자유가 완벽하게 결합된 공간을 발견한 명준은 새롭게 탄생한다.
광장: 최인훈 지음/문학과지성사/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