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디테와 지음

창작 편집

3월의 마지막 일요일 새벽에 친구들과 백양사로 떠난다. 채 열 시가 되기 전에 백양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부지런히 백양사로 향한다. 입구에 도달하니, 우뚝 솟은 어마어마한 바위 봉우리의 중압감에 압도된다. 하늘을 찌를 듯 꼿꼿하게 솟아오른 백암산의 암벽은 천상에서 내려온 준엄한 거인 같다. 깎아지른 바위의 단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옆에 있는 친구는 감탄한다. “저 거대한 바위산을 보니, 우리가 쥐라기 공원을 걷고 있는 것 같다!” 거칠고 거대한 스케일은 인간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못한다. 금방이라도 저 거대한 바위 봉우리 사이로 티라노사우루스의 포효가 들려올 듯한 긴장감이 감돈다.

우리는 원시적인 중압감을 뒤로한 채, 백양사 경내로 진입한다. 고불매가 흐드러지게 피어 담장 너머로 뻗으며 선홍빛 홍매화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고불매 향기가 내 코끝에 전해지며, 내가 봄 한복판에 들어왔음을 각인시킨다. 고딩 국어 시간에 정극인의 ‘상춘곡’을 배우며, 언젠가는 나도 꼭 봄을 만끽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건만, 눈 한번 감으니, 39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담장 아래 축 늘어진, 홍매 줄기들은, 붉은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고, 위쪽의 찬란한 핑크빛 꽃망울은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첫사랑의 수줍고도 대담한 고백처럼 다가온다. 낡은 전각의 붉은 외벽을 타고 향긋한 내음이 백양사 경내를 다 덮으며, 내 시선과 영혼은 순식간에 향긋하게 흔들리고 있다. 로토스 향기에 정신을 잃은 오디세우스와는 달리, 내 곁에는 기획자 친구가 현실을 각성시키고 있다. 우리는 고불매의 향긋함을 뒤로하고, 다음 행선지인 선운사로 떠난다.

선운사 주차장은 엄청나게 넓다. 고딩 2학년 때 수학여행을 떠났던 설악산을 연상시킨다. 일단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선운사 경내를 소요한다. 대웅전 한편에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또 다른 자태를 뽐내는 백매가 눈에 들어온다. 백양사의 홍매가 마당 가득 채우는 진한 향기로 존재감을 드러냈다면, 선운사의 백매는 거친 흙바닥 위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은은한 청향을 건네고 있다.

백양사 홍매의 향기는 코끝을 스치는 순간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의 몸짓으로 다가와서, 잊고 있던 감각을 단숨에 깨우고 나를 봄의 한복판에 밀어 넣어버렸다. 선운사의 백매는 서두르지 않는다. 화려한 색채를 지우고 순백의 정갈함만을 남겼기에, 나는 발길을 멈추고 오래도록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단아한 기품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나는 백양사의 홍매를 아프로디테라 부르고 싶고, 선운사의 백매를 지음이라 부르고 싶다. 파리스는 아테나와 헤라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뒤로하고, 결국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한 아프로디테를 선택했다. 홍매의 꽃봉오리 끝에서 터져 나온 핑크빛 꽃구름은 아프로디테의 향긋한 내음처럼 감각을 마비시킨다. 코끝을 파고드는 그 강렬한 향긋함은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지혜도, 지금 이 순간 내 코 끝에 다가온 유혹 앞에서는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

오전에 마주한 홍매가 파리스의 심장을 뒤흔든 아프로디테의 화려한 유혹이었다면, 오후에 보드란 햇살 아래 마주친 백매는 오직 백아의 거문고 소리만으로 마음을 읽어 주던 종자기의 지음 그 자체다. 백매의 소박한 흰 꽃잎은 백아가 거문고를 켜기 전에, 정갈하게 씻어낸 손끝이다. 화려한 색조로 눈을 현혹하지 않고 오직 순백만으로 서 있는 그 자태는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울리는 거문고의 맑은 음이다.

나는 홍매와 백매 중 어느 쪽을 선택할까? 오전에 볼 때는 홍매에 빠져 들었는데, 오후에 보니 백매에 새삼 홀라당 반한다. 백양사의 햇살이 뜨거워지는 시간, 담장 너머로 쏟아지는 홍매의 핑크빛과 향긋함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낡은 단청과 대비되는 그 선명한 생명력은 나를 봄 매혹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 선운사의 백매 앞에 섰을 때 나는 한결 차분해졌다. 화려한 색조를 덜어낸 은은함은, 오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시선을 오래도록 머물게 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지음 같은 오랜 벗처럼,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위로를 건넨다. 게다가 백양사의 홍매와 선운사의 백매는 39년 전의 미션에서 나를 해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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