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과학
보드라운 봄기운을 듬뿍 맛보러, 창경원의 아련한 추억이 있는 창경궁으로 향한다. 올봄은 유난히도 급격하게 서늘함과 따스함을 변주하며, 나를 긴장시킨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리니, 대학 신입생 시절의 설렘이 겨드랑이를 스친다. 창경궁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갑자기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립다. 창경궁 한 코스 전에 내려서, 바로 커피를 주문한다. 쌉스러우면서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창경궁으로 걷는다. 창경궁 인근은 온갖 격벽을 두르며, 새 단장 중이다. 창경궁에 입장하니, 명정문 앞에는 제법 관람객이 많다. 나는 가장 외곽으로 도는 산책길을 선택한다. 이곳은 한갓지다. 창경궁 담장 너머로 고층빌딩이 나에게로 다가온다. 담장 하나를 경계로 현대와 조선이 맞닿아 있는 건가?
춘당지 호숫가를 소요한다. 소로도 나처럼 월든 호숫가를 유유자적 걸었겠지? 나는 창경궁의 깊은 안쪽에 자리 잡은 춘당지를 좋아한다. 오늘도 춘당지는 수심이 깊어 보이는 짙은 녹색의 물빛으로 고즈넉한 풍광을 연출하며, 하늘과 나무를 아늑하게 품고 있다. 잎이 없는 가지 사이로 보이는 깨끗한 파란 하늘은 시야를 시원하게 틔워주며, 다가올 봄의 생동감을 느릿하게 기다리는듯하다.
갑자기 오른쪽에서 회백색 줄기의 흰빛이 반사되기 시작한다. 서럽게 흰 백송이다. 나는 헌법재판소랑 조계사에만 백송이 있는 줄 알았다가, 춘당지 호숫가에서 눈부신 백송을 만나니,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다시 걷는다. 호숫가를 지나 양화당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오른다. 산등성이 이곳저곳에는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나무들이 갈색빛으로 우울함을 내뿜지만, 생강나무는 유난히도 노란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톡톡 터진 노란 꽃은 먹음직스러운 팝콘 같다. 화사한 꽃봉오리를 들여다보면, ‘생강나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명에는 꽃이나 가지를 살짝 꺾어 냄새를 맡아보면, 알싸한 생강 냄새가 난다고 쓰여 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알싸하고 향긋한 노란 동백꽃”이 바로 이 생강나무 꽃이 아닐까?
산모퉁이를 도니, 꽃 내음이 확 퍼져온다. 종종걸음으로 그 진원지를 찾아가니, 복사꽃이 화사하게 얼굴을 들고 있다. 아직은 분홍 꽃이 덜 들었지만, 꽃이 만개하면, 이 산등성이는 무릉도원으로 변신할까? 아래쪽 양화당 뒷마당에는 매화가 고즈넉한 단청과 어우러져 은은하고 격조 있는 연분홍빛을 띠고 있다. 그 바로 옆에는 화사한 분홍빛 진달래가 기품 있게 피어 있다. 전각의 기단과 마당의 정갈한 풍경 덕분에 진달래의 분홍빛이 한증 더 돋보인다.
생강나무, 복사꽃, 매화, 진달래까지 창경궁이 열어준 봄꽃의 성찬을 나는 꽃들의 향연이라 부르고 싶다. 춘당지 인근 오르막길에 알싸하게 노란 기지개를 켜고 있는 생강나무, 소나무 언덕길 주변에 달콤하고 화려하게 꽃 내음을 풍기는 복사꽃, 양화당 뒷마당에 고결하고 은은한 격조를 발산하는 매화, 전각 사이 돌계단에 수줍고 화사한 분홍 꽃을 피워낸 진달래, 이들이 엮어내는 합창은 정교하게 준비된 갑진 공연이다.
지구는 꾸준히 태양의 주위를 돌아 점점 강렬한 햇볕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만, 공기 중에 버티고 있는 동장군의 미련이 날리는 서늘함으로 우리는 아직도 헷갈리다가도, 복사꽃의 꽃내음 진동이 후각과 시각으로 동시에 우리를 일깨울 때가 돼서야 실감한다. 나는 꽃들의 향연 중에서 생강나무가 제일 대단하게 보인다. 다른 화려한 꽃들이 따뜻한 남풍을 기다릴 때, 생강나무는 서늘한 공기 속에서도 태양이 보내는 미세한 신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어쩌면 생강의 알싸한 향기는 차가운 동장군과 치열하게 싸우며 만들어낸 생존의 내음일 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이 꽃들의 향연이 짧은 생명으로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잎보다 먼저 피어난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나, 양화당 뒷마당의 매화는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던지고 있다. 이 짧은 개화의 순간을 목격하며, 이제야 ‘아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다가오고 있구나’를 직감했다. 태양의 궤도는 이미 봄의 한복판에 들어섰지만, 고마운 꽃들의 몸부림 덕분에 자연의 섭리와 피부 감각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