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편집
저작권은 저작자 사후 70년이 지나고 나면, 그의 창작물은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창작물은 저작자의 상상에서 태어나지만, 그 개인의 언어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기류나 어조가 녹아 있다. 그의 작품은 시대가 낳았고, 시대가 품었으니, 저작권이 소멸한 후에는, 그의 작품은 그의 시대로 돌아간다. 결국 작품이란, 시대의 품에서 자라는 아이인 것이다.
불멸의 희곡, ‘맥베스’는 420년 전에 창작됐고, 셰익스피어는 403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여전히, ‘맥베스’의 책 표지에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이라고 표시해야만 한다. 그의 인격권은 시간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는다. 다만, ‘맥베스’는 우리 모두의 작품이 되어, 책 표지에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이라고 표시하기만 하면, 아무나 그의 작품을 다양한 언어로 번역할 수 있고,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연출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작가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영국에는 아직도 상류층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1453년 백년전쟁을 끝내며,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도생으로 갈라졌지만, 프랑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영어는 북방 계열 언어이고, 프랑스어는 남방 계열 언어지만, 영국이 400여 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결과, 영어 단어에는 많은 프랑스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영어 단어 ‘deer’는 원래 짐승이나 야수를 뜻했지만, 프랑스어 ‘beast’가 유입된 이후에는, ‘deer’는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흔한 짐승인 사슴을 뜻하는 단어로 격하됐다. 또한, 소는 ‘cow’지만, 소고기는 ‘beef’로 분리된 것은, ‘cow’는 평민이 기르고, ‘beef’는 주로 상류층이 먹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을 모두 영어로 쓰면서, 단어마저도 새롭게 창작해 냈다. 셰익스피어는 새로운 문학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무찌르며, 전 세계적으로 진출하는 자신의 조국 영국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맥베스’를 읽으면, 인간의 삶에 대한 냉철한 그의 인식이 파노라마처럼 불쑥불쑥 다가온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레이디 맥베스가 유명을 달리한 직후에, 비보를 전하는 신하에게 맥베스의 심정을 토로하는 대사다. “인생이란 그림자를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 버리는 것.”
맥베스 일생의 동반자, 레이디 맥베스의 죽음을 접하고 읊는 독백은, 자신과 야심을 공유했던 왕비를 떠나보내면서, 자신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인생을 ‘그림자를 걷는 것’이라 말하며, 우리의 삶이 빛 위에 얹힌 현상에 불과하다고 노래하고, ‘무대에서 안달하다 사라지는 배우’가 자기 자신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멋진, ‘맥베스’는 더 이상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자유롭게 변주할 수 있다. 다만, 원작을 모욕하거나 왜곡하는 것까지는, 용납되지 않는다. ‘맥베스’가 상상력이 숨 쉬는 공공의 영역에 돌아왔다 할지라도, 완전히 방목된 것은 아니다. 변주에도 지켜야 할 품위의 선이 존재한다.
저작권이 만료되면, 재산권적 측면에서는 자유롭게 복사할 수 있고, 변주할 수 있지만, 인격권적 측면에서는 저작자의 이름을 지우거나 창작 의미를 짓밟는 방식으로 시대의 품에서 자란 아이를 다룰 수는 없다. 저작자의 사후에도 그의 존엄을 지키며, 그의 작품을 대하는 것이 저작자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정체성은 그와 관계를 맺은 모든 독자의 기억 속에 편재되어 있다. 이미 셰익스피어의 애독자들은 ‘맥베스’를 통해서 그의 이름을 불러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 그런 독자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셰익스피어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작품은 새로운 시대의 품에서 자라는 아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