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광장

창작 편집

오후에 대학로에서 연극을 감상할 예정이지만, 역사적인 BTS 컴백 공연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어서 11시에 집을 나선다. 다행히 아직은 광화문역에 정차한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제일 먼저 2열로 도열해 있는 안전요원들이 눈에 띈다. 그들은 세종문화회관 방면은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다고 안내한다. 나를 포함한 한 무리의 방문객들은 교보문고 쪽으로 나선다. 밖으로 나가니 여러 대의 경찰 버스에서 경찰관들과 안전요원들이 관광객들과 축제 관람객들을 안내하고 있다. 대학 시절에는 경찰 버스를 '닭장차'라 비하하며, 열라 싫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경찰 버스가 이다지도 믿음직스럽다니! 우리 사회가 좋아진 걸까? 보안대를 통과하여 최대한 무대 가까이 걷는다. 인근 인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저 멀리 설치된 무대 디스플레이에는 "JUNG KOOK"이라는 글자만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더 다가가지 못하고 유턴한다. 겨우 사진 한 장만을 찍고 인파에 밀려 세종대로 중간에서 탈출한다.

한숨 돌리고, 다시 무대 장치 너머를 바라본다. 광화문과 그 뒤를 북악산이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전통적인 궁궐과 최첨단 공연 장비가 한데 어우러져, 오직 이곳 광화문 광장에서만 볼 수 있는 독보적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오늘 밤 국적과 나이의 경계를 허무는 해방감을 발산하며, 음악과 환희의 파동이 넘쳐나는 축제의 광장을 상상하면, 전율이 느껴진다.

저절로 2002년 6월 응원의 광장이 떠오른다. 나는 그 당시 수험생이어서, 직접 응원의 광장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TV를 통해서 지켜본 응원의 광장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을 외치며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만들어냈었다. 2002년의 붉은 함성이 오늘의 보랏빛 물결로 겹쳐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에 응축된 에너지는 신명이었을까?

최인훈은 1960년 11월에 ‘광장’을 썼으니, ‘광장’의 주인공 명준은 1960년 4월 학생의 광장을 봤겠지? 명준은 남한의 광장은 타락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뿐이라고 좌절했다. 월북한 후에 바라본 북한의 광장은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며, 중립국으로 향하는 타고르호에 오른다. 결국 명준이 바라본 남한의 광장은 최인훈의 시각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1960년 4월 학생의 광장을 지켜보면서, ‘광장’을 써 내려갈 의미를 얻지 않았을까?

학생의 광장은 실존의 광장으로 다가온다. 이 광장은 밀실을 뛰쳐나온 개인들이 자유라는 거대한 역사적 파고를 마주해야만 했던 장소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실존의 광장에 선 우리의 선배들은 자신의 실존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처절하게 투쟁했다. 언제나 밀실과 광장을 고민했던 명준은 이 광장을 관조하며, ‘학생의 광장이 진정한 광장일까’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어느덧 42년이 흘러, 광장은 투쟁의 무거움을 벗고, 신명의 놀이터로 변모했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승리라는 공통의 환희 아래 모인 우리 모두는 어깨를 걸었다. 학생의 광장이 파편화된 개인을 실존의 공간으로 불러냈다면, 응원의 광장은 억눌려온 한을 신명의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우리는 이 신명의 광장 이후에 우리의 역동성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오늘의 광장은 더 이상 국가나 민족이라는 서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보랏빛으로 물든 광장은 개인의 취향이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초월적 문화 공간이다. 어쩌면 명준이 꿈꾸었던 ‘개인이 파괴되지 않는 광장’이 오늘의 문화 공간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의 광장은 목숨을 거는 곳도, 승부에 집착하는 곳도 아닌, 나의 즐거움이 타자의 즐거움과 조화롭게 만나서 공명하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명준이 정국의 이름이 적힌 대형 스크린과 보랏빛 응원봉을 든 아미들이 조화롭게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한다. “학생의 광장에서는 실존을 외치며 피를 흘렸고, 응원의 광장에서는 신명으로 한을 풀었으니, 이제는 축제의 광장에서 콘서트를 즐길 때가 됐네. 나의 광장은 차가웠지만, 오늘의 광장은 참으로 따뜻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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