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 위의 달구경

응원봉

청나라 초기인 17세기 중반 ‘장조’가 쓴 ‘유몽영’에는 “소년의 독서는 문틈으로 달을 엿보는 것과 같고, 중년의 독서는 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장년의 독서는 누각 위에서 달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오로지 살아온 경력의 얕고 깊음에 따라 얻는 바도 얕고 깊게 될 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나에게 투사해 보면, 나의 20대는 무척이나 바빴다. 일단 다양한 여성들을 만나기 위해서 사방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주로 재끼(어릴적에 엄마는 도박을 재끼라고 불렀다)를 하거나 시험 준비를 했다.

그래서 20대 때 나는 독서를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서 어떡해서든 여성을 후리기 위해서 당시의 유행하던 책은 속독했다. 두 번 읽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토끼’를 ‘도끼’로 잘못 읽은 적도 있었다. 명사들이 자신의 땀과 열정을 바쳤던 역작들을 수박 겉핥기로 읽었던 것이다.

20대 때의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인지 마음이 다른 곳에 팔려서인지 차분한 독서를 하지 못했고, 이러한 상황은 좁은 문틈을 통해서 겨우 달을 엿보는 수준의 달구경과 너무도 닮아 있다. 따라서 나는 전적으로 ‘소년의 독서는 문틈으로 엿보는 달구경’이라는 구절에 10,000% 동감한다.

20대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고, 30대에 접어들어, 나는 결혼도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당시 내 인생의 반은 집에서 보냈고, 반은 회사에서 보냈다. 특히, 회사에서는 출세욕에 휩싸여 내 역량을 벗어나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수행했다. 집과 회사라는 울타리를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있었다.

그래서 주로 나는 출세에 도움이 될 만한 자기 계발서를 울타리에 둘러싸인 뜰 안에서 달을 바라보듯 읽었다. 이러한 자기 계발서는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러다 살짝 드는 생각은 자기 계발서를 권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감동받으며 읽었을까 의심이 들어, 자기 계발서 대신에 인문학 관련 서적을 읽었다.

마지막 단계인 ‘누각 위에서 달구경’하듯 읽는 독서, 상상만 해도 참 멋지다. 누각 위에서 달을 구경하면, 일단, 주변에 장벽이 존재하지 않아서 좋다. 오롯이 달만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지금 서울에서 누각 위에 올라가서 달을 보면, 어디에서든 마천루가 보일 것이다. 장조의 누각 위에서 달구경을 제대로 맛보려면 월드타워나 북한산 정상에 올라가야만 될 것이다.

고딩 시절에 홍성대의 수학 정석을 열심히 풀었다. 이 문제집은 제일 먼저 박스 안에 수학 공식이 적혀 있다. 하지만 이 수학 공식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단박에 공식이 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공식이 적용된 다양한 문제를 풀어본 뒤에야 공식에 담긴 본질을 인식할 수 있었다.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하여 전달하려고 최선을 다해서 기술하지만, 독자가 저자와 유사한 경험이나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야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굿윌헌팅을 보면, ‘맷데이먼’은 수학, 법학, 역사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어린 시절 받은 상처로 인하여 세상에 마음을 닫고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책 내용이나 심리 전문가의 컨설팅 내용을 왜곡하는 장면이 여러 번 반복된다. 맷데이먼이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인생 경험이 일천하여, 책 저자의 맥락이나 심리 전문가의 컨설팅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장조가 이야기하는 ‘누각 위에서 달구경’하듯 읽는 독서는 이런 게 아닐까? 소년 시절의 질풍노도를 지나고, 중년에서 다양한 경험을 맛보고 그 경험이 주는 의미를 찬찬히 성찰해 본 뒤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장벽을 뛰어넘는 관점에서 책을 읽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장조를 좋아했던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에서 “자기가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했고, 자기가 느낀 것과 똑같은 느낌을 가졌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자기보다 우아하고 보다 쉬운 말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17세기 중반 청나라에 살았던 옛사람 장조와 20세기 초반 복건성에 살았던 옛사람 임어당의 글을 보면서 시간의 간극과 공간의 간극을 뛰어넘는 황홀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장년의 독서는 누각 위에서 달을 구경하는 것’이 바로 ‘내가 느낀 것과 똑같은 느낌’을 나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보다 쉬운 말로 표현한 것이다. 과연 이 세상 누가 독서의 본질을 ‘누각 위에서 달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담백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의 30대와 40대를 회고하면 집과 회사라는 울타리에 얽매여 살았다. 그런 와중에 내가 읽었던 인문학 책의 내용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집과 회사 상황 및 그동안에 내가 했던 경험에 맞추어 해석했다.

인생의 5학년에 접어든 지금도, 나는 누각 위에서 달을 구경하듯 독서를 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누각 위에서 달을 구경하듯 독서를 하려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누각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야 가능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처음에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출발하지만, 이내 누각 위로 두 걸음 세 걸음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걷다가, 누각이 보이면 숫제 달려간다. 어떡해서든 누각 위로 올라가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다.

고딩 때는 문틈으로 보이는 대학 생활이 너무 멋져 보였다. 그래서 나는 기를 쓰고 문을 열어젖히고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다. 막상 대학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냥 고딩 때의 일상과 비슷했다. 5학년이 된 지금도 이런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장조가 말한 ‘장년’은 인생 6 학년 즈음인가? 꼭 육체적 나이를 한정한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를 육체적으로 먹지 않고 사회적으로 먹는다. 나는 대학을 일 년 먼저 들어왔다. 초등학교를 월반한 것은 아니고,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초등학교를 일 년 먼저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두 살 많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심지어는 세 살 많은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전혀 그런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때는 내가 대학에 일 년 일찍 들어온 게 좋았다.

그러다가 아들을 30대 후반에 얻어, 아들의 학부모를 만나니 대부분 나보다 젊었다. 나보다 젊지만 이미 육아 경험이 많은 아빠도 여럿 만났다. 나는 아빠들의 세계에서는 어린 편에 속했다.

장조가 말하는 장년에 도달하려면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서 성숙해져만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누각 위로 올라가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니, 성숙할 틈이 없나 보다. 경험이 쌓일수록, 마음의 여유를 갖고, 누각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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