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9월 둘째 금요일 오후에 맘이 맞는 대학 선배가 회사로 찾아왔다. 비가 흩뿌리는 날씨에, 우리는 회사 인근 삼겹살 식당에서 낮술을 마신다. 그 선배는 낭만파다. 그는 언제나 소년 같은 꿈을 품고 산다. 그는 성공하더라도, 절대로 전원주택을 사지는 않을 거란다. 대신 친구들 생일에 소주 한 잔 마시며, 100만 원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그 명단에 너도 들어 있다.”
자연스럽게 ‘천만매린’ 고사성어를 이야기한다. 중국 남북조 시대, 송계아는 벼슬길에 오르면서 집을 새로 장만하려 했다. 그때 친구가 조언한다. “집을 살 때는 반드시 좋은 이웃을 살펴야 한다.” 마침 여승진이라는 인물이 인근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청렴하고 학식이 깊으며 인품도 고결한 인물로 유명했다. 송계아는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천만금에 이르는 집값을 치르더라도 여승진의 옆집에 살고 싶다고 말하며 결국 그 이웃이 된다.
송계아는 집은 백만금을 주고 샀지만, 천만금은 좋은 이웃을 얻기 위해 집값의 열 배인 천만금을 지불한 것이다. 집 자체의 값어치는 아무리 비싸도 한정되어 있지만, 여승진 같은 훌륭한 이웃을 곁에 두는 가치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는 뜻이다.
집은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지지만, 삶은 이웃의 숨결로 완성된다. 백만금으로 산 것은 벽이었으나, 천만금으로 산 것은 마음이었다. 재산은 사라져도 좋은 이웃은 곁에 남아, 세월을 함께 지키는 성곽이 된다.
송계아는 결국 집보다 이웃, 재물보다 친구를 더 귀하게 여긴 셈이다. 집은 삶의 터전일 뿐, 그것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해도 결국은 그저 벽돌과 기와에 불과하다. 하지만 좋은 이웃, 좋은 친구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하며, 집의 가치를 몇 배나 뛰어넘게 만들어 준다.
집은 공간을 채우지만, 친구는 시간을 채운다. 재산은 쓰면 줄어들지만, 친구는 나눌수록 깊어진다. 그래서 송계아는 집을 사면서도, 사실은 삶의 벗을 산 것이었다.
집과 친구
벽은 세월에 무너지고
기와는 바람에 부서지지만
한 번 맺은 우정은
백만금을 넘어
천만금의 빛으로 남는다
우리가 사고 싶은 것은
흙집이 아니라
마음의 집, 친구라네
우리 사회에서 전원주택을 지으면 대개 넓은 땅과 멋진 집은 손에 넣지만, 정작 함께 삶을 나눌 이웃이 사라진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싫든 좋든 관계망이 얽히지만, 전원주택은 고립을 불러온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마을 공동체보다는 도시의 네트워크형 삶에 익숙하다. 따라서 전원주택은 집은 아름답지만, 인간관계의 공백을 메우지 못해 외로움과 불편 속에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전원주택 실패담은 바로 천만매린 고사의 반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집은 백만금 들여 샀지만, 이웃은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 결국 외로움과 고립 속에서 삶의 만족이 무너지는 것이다.
전원주택은 처음에는 자연과 여유의 낙원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의 공백이 깊어진다. 불편을 함께 나눌 이웃도, 대화로 위로를 건넬 벗도 없으니, 집은 점점 더 공허해진다.
송계아는 “집은 백만금, 이웃은 천만금”이라고 말했지만, 전원주택의 현실은 이렇다. “집은 백만금 들였으나, 이웃은 없고, 결국 배우자도 떠났다.” 천만금을 주고도 얻어야 할 것이 관계와 우정이라는 진리를 외면한 대가다.
우리 사회에서 은퇴 후 전원주택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자, 도시의 상처를 씻으려는 꿈이다. 하지만 집은 사람을 품지 못하고, 텃밭은 대화를 길러내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천만금을 들여 외로움을 사고 있는 건 아닐까?
잘못 지어진 전원주택을 보면, ‘무식이 부를 만나면 천박해진다’는 경구가 떠오른다. 자연 속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기둥, 유럽의 성을 흉내 낸 외관, 번쩍이는 대리석 마감, 이런 집들은 오히려 주변 풍경을 해치며, 부를 과시하려는 욕망만 드러낸다.
결국 ‘무식이 부를 만나면 천박해진다’는 것은 돈이 지혜와 미감을 만나야 진정한 가치가 된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지혜 없는 부는 과시적 천박함을, 미감 없는 부는 불협화음을, 공동체 없는 부는, 고립과 파멸을 부를 것이다.
무식과 부
부는 땅을 사지만
지혜는 삶을 산다
무식이 부를 만나면
산은 상처 입고
집은 감옥이 되네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는 집
그것은 천박의 다른 이름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