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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길목에서 싸늘한 빗줄기를 온몸으로 맛보다

응원봉

입하가 막 지난 토요일, 비 갠 새벽에 세찬 바람을 뚫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대학 동아리 친구들과 고창으로 소풍을 떠난다. 첫 지하철에는 나처럼 나들이 승객들이 많다. 집합 장소에 도달하니 친구들은 이미 차에 탑승해 있다. 인생 5학년 중반이 되니 다들 새벽잠이 없다. 마지막 친구를 태우고 경부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빗줄기는 멈출 기세 없이, 내 앞 유리를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있다. 오늘 무사히 고창 답사를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을 뒤로하고 일단, 예당호 휴게소에 들어선다. 고요한 호수 풍광을 마주한 카페는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우리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달짝지근한 사과파이를 주문한다. 따끈한 커피 한 모음에 사과파이를 조금 베어 물었지만, 허전한 뱃속이 금방 든든해진다. 우리는 서둘러 차에 올라 고창읍성으로 달린다.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 고창읍성을 멀리서 바라보면, 유럽의 중세 시대 캐슬 같다. 오늘의 소풍을 기획한 친구에 내가 묻는다. “읍성 안에는 누가 살았어?” 그 친구가 답한다. “사또와 주요 인사들이 거주했어.” 내가 다시 묻는다. “그럼 성 안에 사람들인 ‘부르주아지’와 비슷해?”, 그가 답한다. “유사한 점이 있지”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봉건 귀족은 아니지만, 상공업, 금융업에 종사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 계층이다. 고창읍성 내 거주자는 관료나 군인으로서 신분적으로는 양반 또는 중인 계층에 속한다. 따라서 이러한 읍성 거주자는 경제적 기반보다는 신분에 의한 권위가 중심이었다.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시민혁명 등을 통해 근대 정치 체계의 주역으로 등장하지만, 읍성 내 거주층은 유교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에 집중한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읍성 정문을 통과해, 중심부로 향한다. 비가 그치지 않아, 우산을 쓰고 나무 사이를 걷는다. 바람을 동반한 빗줄기가 우산이 커버하지 못하는 내 신체에 교묘하게 도달된다. 내 빰을 때리는 빗줄기는 서늘함을 넘어 싸늘하기까지 하다. 여름 길목의 을씨년스러운 비가 다른 관광객들을 밀어낸 덕분에, 읍성 안에는 우리밖에 없다. 살짝 얄미운 빗줄기가 우리에게만 이 너른 숲을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걷다 보니, 전통적 선명한 단청이 눈에 확 들어온다. 객사 건축물이다. 다른 건물보다 크고 화려하다. 기획자 친구가 설명한다. “객사는 왕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야. 그래서 객사는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 왕의 의례에 따라서 동헌보다 격식 있게 지었어.” 평소에는 객사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친구가 몹시 믿음직스럽기만 하다.

갑자기 기획자 친구가 신록의 잎이 무성하며 그 잎 위로 화사한 흰 꽃이 부채처럼 펼쳐진 나무를 가리킨다. “이 나무의 이름은?” 우리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자 힌트를 준다. “가지의 구조를 잘 봐봐.” 나는 눈만 뻐끔뻐끔 떴다 감았다 할 뿐이다. 그가 답한다. “층층나무” 그의 답을 듣자마자, 그 나무를 다시 보니, 정말로 가지가 층층이 레이어를 이루고 있다.

객사를 뒤로 하고, 옆으로 다시 걷는다. 이번에는 단청이 없는 수수한 건물이 보인다. 동헌이다. 이 동헌의 정면은 여느 사대부 주택과 별반 차이가 없다. 정면에 연장된 ‘ㄴ자’ 형의 건물은 전통적인 서원처럼 앞뒤가 탁 트여 있다.

‘ㄴ자’ 건물의 퇴청 마루에 오르니, 뒤편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록 창연한 숲이 다 내 것이 된다. 여기에 계속 머물면 나도 신선이 될 것 같다. 이 무릉도원을 바라보니, 북송 시대의 시인 소강절이 너무도 담백하게 ‘일반청의미’를 노래한 淸夜吟(청야음; 맑은 저녁을 음미함)을 저절로 읊게 된다.

淸夜吟(청야음; 맑은 저녁을 음미함)

月到天心處(월도천심처; 달은 하늘 한가운데 떠오르고)

風來水面時(풍래수면시; 잔잔한 바람이 물 위로 불어올 때)

一般淸意味(일반청의미; 일반적이지만, 나에게는 맑고 의미 있는 것을)

料得少人知(요득소인지; 헤아려 깨닫는 이는 어디 있을까)

이제는 다시 정문으로 돌아와 읍성 둘레길을 걷는다. 1미터 내외 폭의 성곽길의 한편은 숲이고, 다른 한편은 낭떠러지다. 낭떠러지의 높이는 갈수록 커진다. 구릉 지형을 이용하여 높은 곳에서 지어서, 적을 감시하고, 공격을 대비하기에 유리하다. 또한 장마철에는 침수 위험이 줄어들어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서 안정성이 확보될 것 같다.

중간에 ‘ㄷ자’형의 돈대가 삐져나와 있다. 그 돈대 맨 앞으로 나서니 고창 시내가 내 눈 아래 확 펼쳐진다. 비 내리는 이때, “야호!”라고 외치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날궂이 한다고 생각하겠지?

성곽길을 따라 끝까지 도달하니, 허접한 전망대가 나온다. 짝퉁 같다. 이걸 도대체 왜 만들었을까? 전망대에 오르려 할 즈음에 비가 내 얼굴 정면으로 내리치기 시작한다. 나는 바로 오르는 것을 포기한다. 다시 반대편 성곽길로 내려간다. 중간중간에 큼직한 벚꽃이 계속 이어진다. 작년 4월 여기에 왔던 친구가 이야기한다. “4월 초순 벚꽃은 엄청나!” 구릉 성곽길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행렬, 상상만 해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성곽길을 일주한 우리는 맛난 식당을 찾으러, 고창 전통시장으로 향한다. 살짝 지쳐갈 즈음, 먹음직스러운 고기 사진을 커다랗게 창문 전체에, 도배한 정육식당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삼겹살과 목살을 주문해서,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구운 고기를 쉼 없이 밀어 넣는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눈 깜짝할 사이에, 고기뿐 아니라 된장찌개, 밥 4 공기가 순삭 된다.

다시 답사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고인돌이다. 우리가 찾아가는 고인돌은 독특하게 ‘ㅠ’ 자형의 북방식이다. 고창의 다른 고인돌은 상석만 존재하는 남방식이지만, 이것만은 두 개의 지석의 사이에 간격을 두고 배치한다. 그리고 그 지석 위에 상석을 올린 것이다. 이 상석의 면적과 두께가 어마어마하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엄청난 상석을 올렸을까? 지배자가 자신의 위신을 자랑하려고 아랫사람들에게 이 삽질을 시켰을까? 그때도 죽음은 두려웠겠지?

다음 행선지인 운곡 람사르 습지로 부지런히 달린다. 이제는 해가 나기 시작한다. 비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 모두는 우산을 챙기지 않고, 빈손으로 탐방 안내소에 간다. 습지 생태공원으로 운행하는 전기 버스의 시간을 묻는다. 25분 후에 출발한다는 설명을 듣고,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그냥 걸어가자”라고 외친다.

바로 운곡 저수지의 둘레길을 걷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한 친구가 “어떡하지?” 묻는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우리에게 빠꾸는 없다.” 계속 걷지만, 빗줄기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굵어진다. 심지어 바람도 불어댄다.

나는 다행히 방수 등산복을 입고 있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잽싸게 후드를 머리에 쓴다. 영락없는 텔레토비다. 우리는 그래도 꿋꿋이 전진한다. 다를 기진맥진해서 걷는다.

이러한 분위기를 깨고자, 기획자 친구가 미세한 바람에도 유난히 잎이 펄럭대는 나무를 가리키며, 나무 이름 알아맞히는 퀴즈를 낸다. 그 친구는 힌트를 준다. “나무잎을 유심히 봐봐.” 놀랍게도 정답은 “사시나무”다. 우리가 몸을 몹시 떠는 상황을 관용적으로 ’사시나무 떨듯 한다‘고 말하는 그 ’사시나무‘다. 그 친구의 나무 설명으로, 추위는 살짝 누그러진다.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한 친구가 하소연한다. “내가 전기 버스를 막아설까?” 다른 친구가 걱정한다. “그런다고 우리를 태워줄까?” 이런 와중에 전기 버스는 무심히 우리 곁을 지나쳐 간다. 내가 그 버스를 바라보며 외친다. “버스 만원인데.”

1시간 정도 빗속을 걷다가 우리는 춥고 지친다. 기획자 친구가 제안한다. “돌아갈 때는 전기 버스 타자!” 나머지는 다들 외친다. “좋아.” 다행히 눈앞에 습지 전시관이 보인다. 나는 제일 먼저 들어간다. 일단 홍보 영상을 상영하는 방을 찾는다. 대개 영상을 틀어주는 방에는 의자가 있고, 어둡다. 내 예상은 적중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영상의 길이가 4분 30초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을 붙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전시관을 나와서 전기 버스 탑승권을 끊는다. 아직도 30분 정도 남았다. 우리는 갈 수 있는 만큼만 가기로 한다. 람사르 자연 생태 공원까지는 가지 못하고, 전기 버스에 오른다. 이번에도 나는 제일 먼저 오른다. 12분 남짓한 시간 동안 운행되는 전기 버스 안에서도 나는 쪽잠을 잔다. 주차장에 돌아오니, 비가 그친다.

우리는 마지막 여정인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로 향한다. 나는 점점 지쳐갔지만, 중산리 이팝나무를 보는 순간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이 나무는 마치 하늘에서 흩날린 흰 눈꽃이 가지마다 내려앉은 듯, 고요한 풍경 속에서 말없이 피어난 한 편의 시다.

여름 길목에서 싸늘한 하늘 아래, 수천 송이 하얀 꽃잎이 무성하게 뒤덮인 가지들은 빛바랜 구름 한 조각처럼 부드럽고, 푸르른 잎 사이사이 흰 꽃들이 촘촘히 피어, 은은한 향기와 빛의 결을 담고 있는 고결한 존재로 서 있다.

기획자 친구는 아쉬워한다. “만개하지는 않았네!” 그렇지만 낙조가 일출의 빛깔보다 더 따사롭게 느껴지듯이, 만개하지 않은 이팝나무는 바람 한 줄기 스치면, 그 꽃잎들이 소리 없이 떨려, 잊힌 기억 속 어머니의 손길처럼 따뜻하고 다정하게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 나무는 지나가는 이에게 말없이 인사를 건네며,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마을의 시간과 마음을 품은 채 조용히 피어오른 하얀 시’로 내 마음에 훅 들어온다.

나는 평소에는 나무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무에 관심이 엄청난 기획자 친구 덕분에, 복귀를 앞두고 너무도 따사로운 선물을 받는다. 이 쌀밥나무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길처럼, 따뜻하고 다정하게 나를 위로하며, 이곳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한없이 따사로운 인사를 건넨다. “All good poetry is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 워즈워드가 시에 대해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오늘의 벅찬 감동을 짧은 시로 대신한다.

중산리 이팝나무

물든 것도 아닌데

꽃잎이 눈처럼 쌓였다

말 한마디 없이

온 마을을 위로하듯

쌀밥나무는 오늘도

하릴없이 피어

조용히 세월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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