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
나는 방랑자
어린 시절, 나는 ‘톰 소여의 모험’의 주인공 톰처럼, 일상의 억압에서 탈출을 꿈꾸었다. 그는 절친 허클베리 핀과 미시피피 강을 따라 해적이 되겠다고 가출을 감행한다. 톰과 허클베리 핀은 학교와 집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면서, 자신을 영웅으로 입증할 기회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그 당시 나는 엄청나게 큰 사고를 치고 나서, 일단 집을 나왔지만, 해가 지자 덜컥 겁이 났다. 집 주위를 뱅글뱅글 돌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추포 되어, 반나절 만에 무사히(?) 귀가했다. 이후에도 수없이 가출을 꿈꾸었지만, 단 한 번도 실행하지는 못했다. 나는 쫄보였을까, 아니면 샌님이었을까?
한국 사회에서는 학창 시절 공식적으로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있는 경우는 수학여행이 유일하다. 학교와 가정이 모두 허용하고, 사회적으로 승인된 첫 번째 일탈인 것이다. 나는 수학여행을 ‘제도적으로 보호된 방랑’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나는 고딩 2학년 때 갔던 수학여행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중딩 2학년 시절에도 수학여행을 떠났지만, 내 머릿속은 허옇다. 고딩 교장쌤은 성적 지상주의자였다. 고딩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엄청난 공약을 발표했다. “너희들, 전국 단위 국영수 모의고사에서 평균보다 30점을 초과해야만, 수학여행을 보내줄 것이다!” 우리는 설마 했다.
당시에는 3월, 6월, 8월 3번 전국 단위 모의고사를 치렀다. 3월 모의고사 결과가 발표됐다. 25.7점 높았지만, 1학년 후배들은 31점이 높았다. 교장쌤은 ‘1학년 후배들은 5월에 수학여행을 갈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우리들에게는 심각하게 경고했다. “너희들, 내가 그냥 수학여행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30점 초과하지 못하면, 수학여행은 없다!”
진짜로 5월에 1학년 후배들은 너무도 자랑스러운 듯이 우리들을 남겨놓고 수학여행을 떠났다. 우리들은 불안함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6월 모의고사를 봤다. 이번에도 실패했다. 이제 마지막 8월 모의고사만 남았다. 용을 써가며 시험을 쳤다. 이과는 29.0점이 높았고, 문과는 30.2점이 높았다. 우리들은 좌절했지만, 교장쌤은 평균 29.6점이어서, 30점이 높은 것으로 퉁쳐 주었다. 문과 친구들은 우리들에게 뻐기기 시작했다. “야, 이과생들, 우리 덕분에 수학여행 가는 줄 알아라!”
결국 어렵사리 수학여행을 떠났다. 가장 좋았던 곳은 설악산이었다. 광주에서 설악산은 어른이 되어야만, 갈 수 있는 여행지였다. 우리들은 설악산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9월 초순에 설악산은, 고딩 교과서에 나오는 ‘금강산 유람기’를 실감케 했다.
일단 흔들바위로 향한다. 누군가 뒤에서 농담 썰을 풀고 있다. “어제 인도에서 온 요가 고수가 흔들바위를 밀어서, 아래로 떨어뜨렸데.” 나는 바로 탄식했다. “그럼 우리는 뭘 보냐?”
내 짝꿍은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너 바보냐?, 저런 구라를 믿게?” 나는 반문한다. “저거 뻥이야?” 그런 사이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흔들바위는 내 눈앞에 멀쩡하게 놓여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흔들바위를 살짝만 밀었다.
나의 고딩 수학여행은 부모 없이 친구들과 함께 외부 세계에 나서는 최초의 사회적 이동이었다. 집을 탈출해서, 친구들 속에서 나로서 지낸 시간은 너무나 즐거웠다. 아쉬운 점은 3박 4일의 일정이 10분 분량의 동영상 추억만을 만들고, 허무하게 후딱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때의 달콤함을 간직하면서, 1년 4개월의 수험 생활을 묵묵히 견딜 수 있었다.
고딩 때는 문틈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대학 생활이 완벽하게 낭만적일 것이라 상상했다. 막상 문을 열고 진입한 대학 생활은 시시했다. 매달 지겹게 봐야 했던 시험, 매주 30시간에 가까운 수업, 1시간 이상 소요되는 등교 상황, 서울에서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했던 쓸쓸함, 나는 서울 대학 생활에 지쳐갔다.
나의 대학 신입생 시절은 완전 꽝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대학 전공이나 직장을 선택할 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좋게 보이는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내가 방랑했던 이유가 처음부터 내 마음이 아닌 타인의 시선을 나침반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나면, 직관적으로 내 안에서 ‘이거 꽝을 뽑은 거 같은데’라는 작은 진동이 바로 울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타인의 시선에 더 민감했던 시대와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랐다는 핑계로, 나의 욕망을 억누르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30대 중반에 나 홀로 이탈리아 5박 7일 패키지여행을 떠났다. 그때 나는 전직하기 위해서 10일 정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옮겨갈 회사의 사정으로 입사가 2주 지연됐다. 매일 술독에 빠져 살고 있으니, 아내가 강제적으로 나 홀로 이탈리아 여행을 보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홀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첫날 호텔 방에서 혼자 짐을 풀고 나니, 내가 맡은 역할이 아닌,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했다. 침대 누워, 아무도 없는 공간을 실감하게 되니, 살짝 불안했다. 완벽한 나 홀로 여행이 아니어서, 낮에는 25명 한국인들과 함께 밀라노, 베로나, 베니스, 피렌체, 피사, 로마, 나폴리, 소렌토 등을 산책했다.
유럽을 직접 내 눈으로 바라본 것도 좋았지만, 홀로 걷는 내내, 내 자아에 대해서 고민해 본 것이 더 좋았다. 이 여행 동안에 나는 나를 낯설게 볼 수 있었다. 머나먼 타지의 숙소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외로움과 독립성을 동시에 체험했다.
나는 나 홀로 이탈리아 여행의 느낌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일단 이탈리아 기행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탐독했다. 지금처럼 글을 썼다면, 기행문을 남겼을 텐데. 그때는 처음 떠난 나 홀로 여행이 나에게 어떻게 의미화됐는지를 써볼 용기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탈리아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내가 봤던 이탈리아 도시들의 추억을 반복적으로 새겼다. 이후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의 이탈리아 여행을 이야기했다. 내 여행담을 처음 들은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근데, 너 이탈리아 얼마 동안 여행했어?” 나는 틈도 주지 않고 답했다. “5박 7일.” 친구는 놀라며 말했다. “나는 30일 정도 여행한 줄 알았어.” 그래도 나는 꿋꿋이 이탈리아 여행담을 풀어냈다. 내 컴퓨터 배경 사진은 카프리섬 해안가를 찍은 것으로 2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2년 후에는, 나에게로 아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이탈리아 여행을 까맣게 잊었다. 나는 한동안 가족 여행을 꿈꾸었다. 아내와 아들이 함께 간 여행 중에서 지금도 나의 뇌리에 가장 강력하게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은 산호세 여행이다.
2017년 추석 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우리는 이때 산호세에 살고 있는 처형댁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나는 특별히 미국을 동경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미국에 가게 됐다. 새벽 5시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걱정했던 제트래그는 없었다. 짐을 풀고 아침을 먹자마자, 처형은 우리를 스탠퍼드 대학으로 데려갔다.
나는 20여 년 전에 미국 유학을 꿈꿨었다.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4년 이내에 미국으로 유학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가 IMF 사태가 우리 사회를 덮쳤다. 나는 바로 미국 유학의 꿈을 접었다. 어쩌면, 미국 유학도 내가 진정으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좋게 보였던 것이리라.
스탠퍼드 캠퍼스가 내 눈앞에 펼쳐지니, 수면 아래 저 깊이 자리 잡았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상상 속에서 꿈꾸던 장소의 출현은 이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나는 20년 전의 나를 만났다. 살짝 설레었다. 20년 전에는 이곳을 꿈꿨지만, 이제는 나의 삶을 되짚어보는 장소가 되었다. 과거의 내가 꿈꾸었던 좌표를, 현재의 내가 찾아와 20년 사이에 쌓인 시간의 층위를 느꼈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의 나를 다시 걷다
한때 나는 꿈을
별처럼 오래 바라보았지
그곳은 아직 가보지 못한 미래
스무 해가 흘러
나는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네
내 안 어딘가가 울컥한다
내가 잊고 있던
그 시절의 내가
바로 저 길목 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네
나는 그에게 말을 건넨다
이제 이곳은
목적지가 아니라
추억이 된 장소
이젠 과거가 아닌
다음 여행을 향해 걷는다
그때처럼
다시 한번, 나답게
나는 왜 아직도 방랑하고 있을까? 지금도 자문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루틴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삶의 결을 무디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삶의 길 위에 서 있다가, 내가 잊고 있던 나의 조각을 만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글을 써야 할까, 아니면 홀로 여행을 떠나야 할까?’ 고민한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면서, 나에게 질문한다. “나는 왜 방랑했을까?”, “나는 누구의 인생을 살았던 걸까?”, “나는 지금 내 삶에 정직한가?”
이런 질문은 외부가 아닌 폐부를 향한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글을 쓰면, 흐릿했던 감정과 충동이 조금 걷히면서, ‘나는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을 정리하고, 삶의 패턴을 되돌아본다. 물론,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완벽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고민해야 할 질문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어서, 글 쓰는 시간이 좋다.
그리고, 감각을 깨워 나 홀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머릿속을 넘어, 몸으로 삶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은 글로는 다 풀어지지 않는 내 무의식의 결을 흔들어 깨운다.
우리는 일상에 익숙해질수록 사물과 경험을 자동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매일 걷는 길, 동료의 얼굴, 내 감정조차도 보는 둥 마는 둥. 여행은 낯선 환경 속에서 익숙한 나를 관조하게 한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일상의 부재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면, 낯선 환경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마음대로 실험할 수 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듣는 순간, 내 사고방식의 한계를 자각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낯선 곳을 방랑하면서, 글 쓰는 것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