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
고딩 3학년 국어 시간에 ‘열하일기’를 처음 읽었다. 살짝 문체가 화려하다는 느낌이었지만, 1780년대 열하일기는 엄청난 선풍을 일으켰고 급기야는 정조는 ‘열하일기’를 대표적인 불순한 문장으로 규정하면서 문체반정을 지시했다. 나도 ‘열하일기’ 같은 삐딱한 기행문을 써보고 싶었고, 이후 몇 번이나 기행문을 써보고 싶었지만, 이제야 첫 삽을 뜬다.
2023년 9월 17년 만에 다시 오사카에 왔다. 2006년 2월에는 출장차 온 것이어서 반나절 만에 신칸센 노조미를 타고 급하게 오사카를 떠났었다. 그 당시 오사카의 인상은 한국어를 구사하는 일본인이 많았다는 것과 2월의 칼바람이 매서웠다는 것밖에 없었다. 이번 방문은 17년의 세월만큼 많은 변화가 있다. 일단 동행 멤버는 15살의 아들과 아내뿐이다. 그리고 머무는 동안 교토의 문화 유적지를 두 군데 방문했다.
간사이 공항에 내려 입국 심사를 받는다. 외국인들은 지문 및 얼굴 사진을 등록해야 만 입국이 가능하다. 예외적으로 16세 미만 외국인에는 이러한 절차를 면제해 준다. 15세 아들만 예외고, 나랑 아내는 꼼짝없이 곤혹스러운 절차를 밟는다.
짐을 찾아서 난바행 라피트 급행열차에 오른다. 급행열차는 깔끔하고, 정확한 시간에 도착해서 난바역까지 40 여분 만에 우리를 데려다준다. 역시 일본은 열차의 나라답게 쾌적한 환경의 기차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무사히 난바역 인근의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워밍업을 시작한다. 먼저 도톰보리강 주변을 둘러본다. 예전에는 일단 많이 돌아다니고 싶어 했지만, 요새는 관조하다가 꽂히는 장소가 보이면 무작정 머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도톰보리강 주변에는 한국어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한국인 못지않게 중국인도 관광 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중국어는 거의 들리지 않고, 영어랑 독일어가 간간이 들린다.
일본이랑 독일이랑 친하다는 것을 오사카에 와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일본과 독일은 언제부터 친했을까? 내 기억 안에서는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는 사건에서 처음 독일이 역사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1970년대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덕분에 우리가 잘살게 됐다는 사실에 나는 독일에 대해서 호감을 가졌고, 고딩 때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2년간 공부했던 추억이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나라 시스템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을 본뜬 것이고, 아마도 그것은 일본의 영향일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은 아시아 중에서는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해서 그런지 오사카는 서울에 비해서 더 다양한 나라의 관광객이 찾는 것 같다.
백승종 선생은 '신사와 선비'에서 니토베가 쓴 '부시도 일본 정신(Bushido! The soul of Japan)'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1900년 초에 일본을 서양에 알릴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날 아침, 8시 즈음 기상하여 호텔 주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라멘집에서 차슈라멘을 먹는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집으로 24시간 영업을 하지만, 밤늦게까지 길게 줄 서고 있어서, 어제는 먹지 못했지만, 아침에 겨우 먹어본다. 엄청나게 긴 줄을 서가면서 먹어볼 만한지 의문이 든다. 다만, 고명으로 배추김치와 부추김치가 무한정 제공되어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 같으며, 부추김치는 내 입맛에 맞다.
10시경에 난바역에서 미도스지선을 타고 우메다역에서 내려 교토 특급 열차를 탄다. 교토 특급 열차에도 맞은편에 한국인 가족이 타고 있다. 우메다역에서 교토가와라마치역까지는 40분이 소요된다.
교토 특급 열차도 라피트 특급 열차처럼 깔끔하지만, 라피트 특급 열차는 현대적인 반면에 교토 특급 열차는 전통적이다. 얼핏 보면, 우리의 무궁화 열차와 비슷하지만, 거의 시속 120 킬로미터를 유지하면서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다.
일본은 근대화를 스스로 진행해서 그런지 전통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조상이 타인에 의해서 살해되고, 후손만 덩그러니 남았다가, 용감한 큰형들이 일본과 열심히 싸웠지만, 미국 덕분에 독립하고, 미국의 영향에 살아남았던 다른 형들이 세운 나라 같다.
그래서 그런지 전통이 무엇인지 아직도 혼란스럽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두 번의 단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15살의 아들이 기성세대가 될 즈음에는 우리의 전통과 정체성이 확립되길 바란다.
교토가와라마치역에서 내려 청수사행 207번 버스를 탄다. 일본 버스는 한국과는 달리 뒷문으로 타고 앞문으로 내린다. 그리고 내릴 때 요금을 지불한다. 207번 버스를 우리를 청수사 입구인 산넨자카 앞에 내려준다. 산넨자카에 들어서니 엄청난 인파가 청수사를 향해서 오르고 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 관광객과 교복을 입은 일본 학생들이 섞여 있다.
유홍준 선생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교토의 역사'에서 교토의 제1 명소를 청수사로 꼽고 있다. 교토 제1 명소를 내 눈앞에서 확인하고 있다. 절 입구 삼중탑의 단청은 우리 절과는 달리 주황색이어서 그런지, 방콕에서 본 소승불교의 사찰 같다.
청수사는 우리의 통일 신라 시대에 해당하는 헤이안 시대인 780년 즈음에 창건된 절이다. 불국사가 김대성에 의해서 중창된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청수사는 낭떠러지 벼랑에 나무로 엮은 구조물 위에 본당을 설치하여 웅장한 산세로 둘러싸여 있다. 본당에서 다른 절 건축물로 이동하는 산책길이 불국사에서 석굴암을 지나가는 길이 떠오른다.
아쉬운 것은 아직 푸릇푸릇한 단풍나무가 즐비해 있어서, 상상으로만 울긋불긋한 단풍의 절경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길을 따라 발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은 우리의 선조들이 노래했던 맑은 정기의 산세를 느끼게 해 주지만, 중간중간 끼어있는 법당과 불탑이 내가 한국이 아닌 일본 산사를 걷고 있는 것을 각인시킨다.
청수사는 외국 관광객보다 일본 수학여행 학생과 내국인들이 훨씬 더 많다. 서울의 산을 오르다 보면 요소요소에 절이 있듯이, 교토 청수사 인근에도 다양한 절이 보존되어 있다.
다만 서울에서는 시내 곳곳에 대형 교회가 눈에 띄며, 심지어 동일한 상가 내에 조그만 교회가 다수로 존재하지만, 교토에서는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어떻게 대다수가 불교나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었을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조상이 살해돼서일까? 아니면 미국을 본받고 싶어서일까? 내 주변에서 미국에 유학을 갔다 오지 않고도 유창하게 영어를 잘하는 친구나 선후배는 예외 없이 기독교 신자다.
청수사를 나와서는 산넨자카로 진입했다. 오후 1시가 넘었지만, 오전보다 더 많은 인파가 끊임없이 청수사를 향해서 돌진하고 있다. 청수사가 서향으로 지어져서 멋진 풍광과 어우러지는 낙조를 보고 싶어서다. 우리는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 전통 어묵집에 들렀다. 우리보다 더 다양한 어묵튀김이 즐비해 있다. 나는 에비마요 어묵 튀김을 먹었다.
이번에는 올라왔던 산넨자카를 비켜나서 닌넨자카로 향한다. 닌넨자카에는 오밀조밀한 전통 상가가 줄지어 있다. 상가들 중간에는 불교 대웅전 없이 명부전만 보인다.
우리의 불교는 엄밀히 말하면, 인도 불교의 원전에 따르지 않고, 중국의 동진 시대에 자체적으로 해석해서 구축한 ‘격의불교’를 따르고 있다. 다만, 우리 불교의 특징은 산사의 맨 뒤에 명부전을 지어서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고 있는데, 교토에는 산속에 있지 않고, 해가 잘 드는 상가 중앙에 떡하니 지어져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난바 시장을 돌아다녀 보니, 관광객의 절반 정도는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중국인, 서양인,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인 듯하다.
나는 고딩 때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했지만,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는 독일어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대학원에 입학했던 95년에는 서울에 일본어가 유행하고 있었고, 나는 대학원에서 반도체를 전공하고 있어서인지, 박사 소지자의 10% 정도는 일본에서 유학하셨던 분이었다.
그즈음 나도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0년에 수험 과목으로 일본어를 선택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이후에 어설픈 일본어 실력은 나에게 유용한 기술 정보를 틈틈이 제공해 주었다.
일본어를 공부해서인지, 일본 영화나 일본 소설에 살짝 관심이 있었지만, 일단 일본 영화는 왠지 포르노 같다는 선입견으로 저질스럽게 바라봤고, 일본 소설도 하루키 소설이 출간되기 전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90분 걸리는 곳에 오사카가 있다. 거리상으로는 정말 가깝지만, 내 정서상으로는 가깝지 않은 곳이다. 왜 내 마음속에서는 일본을 밀어내고 있을까?
일본은 2000년대까지 미국 다음으로 돈을 많이 버는 나라였고,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G7 국가이지만, 나는 일본을 시시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의 역사 수업 시간에 일본의 전통 문물을 우리에게 배워갔다고 가르친다. 35년 일본의 지배에 대한 반동으로 살짝 일본을 비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중, 일 세 나라를 비교해 보면, 한국과 일본이, 중국에 비해서는 더 유사하다.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일본, 나에게는 참으로 오묘하고도 품기 어려운 나라다.
오사카에서 마지막 날에는 어제보다는 일찍 기상하여 호텔 인근의 카페에서 아침으로 토스트 세트를 먹고, 서둘러 체크아웃한다. 짐은 호텔에 맡기고, 오늘도 우메다역에서 교토 특급 열차에 올라탄다.
두 번째 탑승이라 그런지 열차 너머로 교토 변두리의 풍경이 눈에 잘 들어온다. 유난히 촘촘한 전봇대가 눈에 띈다. 오늘은 교토가와라마치까지 가지 않고, 카츠라역에서 하차하여 아라시야마행 열차로 환승한다. 아라시야마역에 내리니, 주변은 한적한 시골 풍광이 이어진다.
오늘의 목적지는 아라시야마의 죽림원이다. 죽림원을 가기 위해서는 대언천의 도월교를 건너야 한다. 주변 풍광만을 본다면 한국의 한적한 시골이라고 하더라도 믿을 것이다.
멀리 얕은 하천에서 두루미 한 마리가 한가로이 물에 머물고 있다. 폭 좁은 하천과 낮은 제방이 담양의 관방제림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색적인 다리 모양이 금방 이곳은 한국이 아닌 외국임을 자각시킨다. 도월교를 건너면서 뭔가 관련 시구절을 생각하고 싶지만, 따가운 햇살은 발걸음을 재촉할 뿐 시구절을 읊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도월교를 건너 아라시야마 상가 거리에 진입하니 거리 양옆으로 엄청난 인파 행렬이 이어진다. 더위를 식힐 겸 이층의 카페에 들어가 녹차 빙수를 먹으며 늦여름의 마지막 불꽃을 휘두르는 태양을 피해 본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시 죽림원을 향해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한다. 비탈길 양 옆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담양의 죽녹원의 대나무보다 이곳 죽림원의 대나무가 훨씬 더 통통하다. 이 좁은 산비탈을 인력거를 타고 가는 관광객이 눈에 거슬린다. 지금이 어떤 시절인데 아직도 인력거를 타고 싶을까? 죽림원은 생각보다는 길지 않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산비탈을 내려오다가 유홍준 선생이 추천하는 노무라 겐자이 가게로 찾아간다. 노무라 겐자이 가게는 골목 끝에 일본 전통 가정집처럼 보인다. 가게로 들어서니, 정면 유리창 너머로 평화로운 가정집 정원이 보인다. 우리는 오코노미야끼와 겐자이(일본식 단팥죽)를 주문한다.
겐자이에는 따뜻한 녹차랑 팥알과 살짝 구운 찹쌀떡이 들어 있다. 녹차와 팥알과 찹쌀떡을 동시에 먹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어, 처음 입에 들어가니 알쏭달쏭한 맛이다. 겐자이의 양은 한국에 비하면 너무 적다. 서너 번 숟갈을 뜨니 금방 바닥이 보인다. 너무 허무하다.
겐자이 가게를 나와서는 더위에 지쳐 아라시야마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본다. 버스 안내판에 게시되어 있는 시각보다 15분이나 지났는데도 버스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종종걸음으로 아라시야마역으로 향한다.
역시 여행은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나 보다. 여행이 일정표에 의해서 흘러가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서둘러 가는 도중에도 하천 주변에서 소바에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마시고 싶지만, 아쉬움을 묻으며, 지나친다.
1993년에 개봉된 '데몰리션맨'이라는 미국영화를 보면 최고 권력자인 레이몬드 박사와 그의 비서는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나온다. 영화를 봤을 당시에는 이러한 영화 코드를 읽지 못했다. 한참 뒤에 이 영화 코드가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됐다.
20세기 후반 일본이 경제적 성취를 통해서 미국으로 활발하게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 미국인들은 엄청나게 두려워하고 있었고, 이러한 트라우마를 데몰리션맨의 기모노 의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199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일본의 시대라고 기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기세는 21세기 들어서서 급속히 퇴색되기 시작했다.
내가 세계정세에 살짝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도 이즈음이다. 1991년 발발한 걸프전을 계기로 전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미국은 어떻게 헤게모니를 쥐게 됐을까? 미국 역사를 포함하여 서양 역사에 관련되는 책을 읽었다. 대부분 서양 칭찬 일색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궁금해하는 헤게모니를 쥐게 된 이유를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책은 발견하지 못했다. 미국에 빠져 있으니, 우리나라는 너무 초라해 보였다. 급기야는 미국이 우리나라였으면 바라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 마흔이 될 즈음에, 내가 아무리 미국이라는 아름다운 엄마를 쳐다보면서 내 엄마가 됐으면 소원한다고 하더라도 내 조국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에 관련되는 책을 읽어보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 마음속에는 너무도 허무하게 국권을 빼앗긴 대한민국이 무능하고 초라한 아버지로 자리 잡고 있다. 내 아들 세대에게는 대한민국이라는 아버지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후에는, 일본보다는 중국에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다가 한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자는 나에게 중국 역사에 관해서 심도 있는 인문 정보를 깨우쳐 주었다. 결국 중국어 공부를 시도했다. 학원에서는 중국어 발음을 훈련시켰다. 나는 권설음 장벽에서 막혀 중국어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나는 우회적으로 중국 문화에 관련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경을 두 번 여행했다. 두 번의 여행으로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중국 문화와의 괴리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과는 역사적으로 유구하게 관계를 맺어오고 있지만,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대한민국과 중국은 각자 다른 길을 걷다가, 1992년 다시 교역을 시작해서 그런지, 나에게는 중국이 생경하기만 했다.
반면에 일본과는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현재까지 150여 년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일본이 끼친 영향은 아직도 곳곳에 잔존해 있다.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찔레꽃’ 노래 가사에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이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남쪽 나라’는 매우 어색한 표현이다.
우리에게는 ‘남쪽 지방’이 더 자연스럽지만, 이 노래가 만들어진 1942년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시기여서, 우리말에 일본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침투했던 것 같다. 내 아들이 세상을 주도하게 될 30년 후에는 우리 사회에서 일본의 흔적이 휘발되어 사라질지 궁금하다.
2016년 시작된 BTS의 열풍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서양인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소식과 영화 ‘기생충’이 2019년 칸영화제 수상과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은 나에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했다. 과연 대한민국은 누구일까?
우리 선조들은 서구 선진국의 문화나 제도를 이식하는 데 급급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색채를 만들어 냈고, 중국도 이미 인도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불교인 ‘격의 불교’를 구성해 냈으며, 러시아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마오이즘’으로 각색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전통적 가치와 서구적 가치가 충돌하고 있으며, 자유와 평등의 가치도 충돌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할지 심도 있게 고민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