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건국 이래 패전한 전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 미국은 초반부터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조직화된 혁명적 민족주의 게릴라 운동에게 패배했다. 베트남 전쟁은 최신식 화력의 맹신을 산산이 무너뜨린 전쟁이기도 하다.
미국제 기관총을 사용했던 베트콩: 이들이 사용한 무기들 중에는 남베트남군이 판 것도 있었다.
미국은 1968년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 당시 남베트남에 54만 9,000명의 병력을 배치했지만, 1973년 극소수의 고문단만 남겨놓고 철수했으며, 1975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승리하면서 패전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핵폭탄을 제외한 모든 화력을 동원했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남북베트남 전역이 초토화됐으며, 미군은 베트남 민간인을 대상으로 네이팜을 투하하는 학살행위를 밥먹듯이 했다.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하는 학살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행위는 남베트남에 있던 민중들이 베트콩을 지원하고 도와주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베트콩은 민중의 도움을 받으며 병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사실 베트콩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가 폄하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다. 미국이 내세운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를 경멸하는 의미에서 비엣남꽁싼(Việt Nam Cộng-sản)이라 불렀고, 그렇게 해서 Viet Cong이라 부르게 됐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깃발
실제명칭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In South Vietnam, 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 Việt Nam)이다. 줄여서 NLF라고도 한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탄생한 이유를 보면 이것도 역시 미국의 지배정책 때문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호찌민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배를 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미국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었던 베트남: 북부에는 프랑스를 무찌른 호찌민 정권이 남부에는 민족반역자들로 이루어진 친미 정권이 세워졌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8년간 지속됐고,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 동맹(약칭 베트민, Viet Minh)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베트민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프랑스는 물러났는데, 여기에 미국이 개입했다. 사실 미국은 194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를 지원했고, 전쟁 비용의 80%를 대신 부담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전후로 진행된 제네바 회담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여기서 미국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반공 가톨릭 민족주의자 응오딘지엠을 내세웠고, 제네바 회담에서 약속한 2년 이내의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일방적으로 거부했다.
응오딘지엠: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정적 숙청ㆍ민간인 학살ㆍ독재 정치ㆍ부정부패ㆍ족벌통치ㆍ가톨릭 우대 정책으로 얼룩진 인물이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하며 반대파들을 투옥하고 학살했으며, 과거 프랑스에게 부역하던 집단을 정부와 행정 그리고 군 요직에 앉혔다. 과거 프랑스와의 전쟁 과정에서 베트민이 분배한 토지를 다시 지주에게 돌려주는 짓도 했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응오딘지엠은 12,000명의 정치 반대파를 처형했으며, 4만 명을 투옥했다. 1958년 푸로이 수용소에 수감된 정치범 6,000명 중 최소 1,000명을 독살하고, 독약을 먹은 이들 중 살아있는 자를 처형하는 짓도 했다.
이런 탄압과 학살 사회의 모순이 겹치면서 남베트남에선 민중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조직이 바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말 그대로 민중들이 자생적으로 창설했으며, 베트민 인사들이 개입한 형식이었다. 이들의 무장력은 경미했다.
존 폴 밴의 일생을 다룬 영화 크레모아: 영어 제목은 A Bright Shinning Lie다.
그러나 이들은 1961년과 1962년에 무장력을 늘려나갔다. 남베트남 군대의 부정부패 덕분이었다.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남베트남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했는데, 부정부패가 극심한 남베트남 군부들은 무기를 베트콩에게 팔아 남겼다. 그 결과 베트콩은 단순한 소총에서 기관총까지 무장하게 됐고, 심지어 박격포와 대전차포까지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압박 전투를 지휘했던 존 폴 밴의 사진.
영화 상에서 묘사된 존 폴 밴과 남베트남군 사령부 모습.
미군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헬리콥터와 전투기 그리고 탱크와 장갑차까지 투입했다. 1962년부터 미고문단과 남베트남 무장력은 이렇게 강해졌다. 그러나 1963년은 달랐다. 1963년부터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후퇴가 아닌 전면적인 군사적 대결로 맞섰기 때문이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압박 전투다.
그 당시 남베트남군의 작전 지도
압박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재 호치민시)에서 65km 떨어진 곳에 있다. 1963년 1월 2일 오전 6시 35분 15대의 미국 헬기가 남베트남군을 싣고 압박으로 향했고, 수송헬기들은 압박 지역에 병력을 내려놓았다. 또한 일부는 도보로 향했다. 대략 1,700명에서 많게는 2,500명의 병력이 동원됐으며, 남베트남군에는 장갑차와 전투 헬기도 있었다. 반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병력은 200~300명 안팎이었다. 누가 봐도 병력과 화력에서 남베트남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당시 남베트남군이 투입한 수송 헬기
논 위로 날고 있는 수송 헬기
그 당시 투입된 전투 헬기 기종인 UH-1: 보통 베트남 전쟁 관련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전투 헬기다.
그러나 막상 교전이 일어나자 결과는 달랐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이들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병력은 매복해 있다가 이들이 인근 30m까지 접근하도록 했고, 30m 간격까지 들어오자 맹 공격을 퍼부었다. 투입된 헬기를 기관총으로 격추했으며, 투입된 헬기 15대 중 14대가 손실됐고, 5대가 파괴됐다. 또한 투입된 남베트남군 병력들도 숨거나 도망치기 바빴다.
남베트남군의 APC 장갑차
기관총으로 무장한 APC 장갑차: 압박 전투에서 베트콩은 이 장갑차에 직접 올라가 무력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들은 장갑차의 진격도 막았다. 기습 공격을 받은 남베트남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결국 장갑차를 투입했다. 더 이상 남베트남군이 두려울 게 없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원들은 과감하게 장갑차도 공격했다. 이들 중 일부는 장갑차로 돌진했고, 장갑차 위로 올라타 장갑차 대원들을 사살하여 진격을 무력화했다.
당시 정찰기로 상황을 지켜보던 미군 고문단이던 존폴밴은 남베트남군에게 남은 지상군을 총동원해서 적들을 동시에 공격하라고 간청했으나, 남베트남군 사령관인 후인반까오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이날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참패했다. 투입된 헬기 15대 중 14대가 타격을 받았고, 5대는 완전히 파괴됐다. 장갑차의 경우 8대가 투입되었지만, 2~3대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헬기와 마찬가지로 후퇴했다.
논두렁에 착륙한 수송 헬기
압박 전투에서 파괴된 헬리콥터: 미군 고문단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투 이후 파괴된 헬기를 도로 가져가는 헬기 모습
투입된 남베트남군 병력 중 80~100명 이상이 전사했고, 또 다른 100명 이상의 병력이 부상당했으며, 미군 고문단 3명도 같이 전사했다. 남베트남군은 최소 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반면에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전사자는 18명 부상자는 39명이었다. 남베트남군이 졸전을 거듭한 압박 전투에 대해 존폴밴은 당시 미국인 기자이던 데이비드 핼버스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압박 전투는 빌어먹을 처참한 전투였다.”
놀랍게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최소 7배 이상 많은 병력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한때 응오딘지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조셉 버팅어는 자신의 책에서 압박 전투에 대해, “2,500명의 남베트남군이 200명의 베트콩에게 참패한 졸전”으로 기록했다. 병력 숫자만 놓고 보자면, 베트콩은 10배나 많은 남베트남군에 맞서 대승을 거뒀다.
현재 압박에 있는 승전 기념 동상
압박 관련 베트남측 포스터
베트남사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한 윤충로 교수는 닐 시핸의 저서와 버체트 등 다수의 저서들을 인용하면서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이 400~45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고, 이 중 13명은 미국인이었으며 6대의 헬기가 추락했고, 15대가 파손되었으며 3대의 M-113 탱크가 파괴되었다고 논문에 썼다. 이렇게 보자면, 숫자상 10배가 넘고 미군의 지원으로 압도적인 최신식 화력을 가진 남베트남군이 베트콩에게 참패했다는 얘기다.
압박 전투의 해방전선 측 작전 지휘도를 보고 있는 호찌민: 북베트남에 있던 호찌민 또한 이 소식을 듣었다.
2017년 미국에서 방영한 PBS The Vietnam War 다큐멘터리에서 압박 전투에 참전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참전용사인 레콴콩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가장 힘든 전투에서 우리 병사들은 압박 전투를 떠올리며 용기를 냈죠. 소리치고 열광했어요. 적에 대한 두려움을 잊었어요.”
압박 전투의 승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베트남 측 스탬프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힘의 불균형이 깨진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 힘의 불균형은 미군이 대규모 지상병력을 보내기 전에 이미 깨져 있었다. 1963년 압박에서 말이다. 압박 전투는 전쟁사 및 군사사적으로도 현 베트남이 세운 엄청난 공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압박 전투의 승전을 묘사한 현 베트남 측 선전화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 최정예 부대 대다수를 포로로 붙잡았던 호찌민의 군대와 민중은 미국의 침략과 그 하수인 정권에 맞서 이렇게 싸웠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배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이것이 바로 압박 전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