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서방 연합군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했다. 무려 4년간 준비한 이 상륙작전에 영국과 미국의 서방 연합군은 수천 척의 배와 12,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으며, 상륙 당일에만 17만 명의 병사를 해안에 상륙시켰다. 미군 공수부대가 새벽에 노르망디 지역으로 침투하여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고, 상륙부대는 오마하 해변과 유타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그리고 푸앙트 뒤 오크 지역에도 상륙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에서 묘사된 오마하 해변의 경우 전투가 가장 치열했으며, 여기서만 미군은 최소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이후 서방 연합군은 팔레즈 포위전을 포함하여 독일군에 맞서 여러 전투를 치르며 진격했고, 8월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합동작전을 벌여 수도 파리를 해방했다.
벌지 전투 관련 다큐멘터리: 넷플릭스에서도 방영했다.
프랑스 파리를 해방시킨 연합군은 네덜란드로 진격하기 위해 1944년 9월 이른바 마켓가든 작전을 개시했다. 그 당시 미군은 9~10월이 되었을 당시 거의 독일 국경까지 도달하긴 했으나, 그 이상을 진격하지는 못했다. 영미 연합군은 마켓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을 통해 네덜란드의 에엔트호벤과 네이메헨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라인강의 교량을 확보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따라서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가 계획했던 작전은 궁극적으로 실패했던 것이다. 마켓가든 작전에서 영미 연합군은 7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1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채 작전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아르덴 숲: 침엽수림이 우거진 곳으로 탱크가 다니기에는 다소 좋지 않았다.
만토이펠 장군: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 기갑사단을 지휘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의 진격을 방어하기에만 급급했던 히틀러는 서부전선에서의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마지막 도발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벌지 전투였다. 독일에게는 아르덴 대공세(Ardennes Counteroffensive)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아돌프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마지막으로 감행하는 대공세였다. 쉽게 말해 독일 측에 있어서 서부전선의 생사가 걸린 마지막 도발이었다. 1944년 11월 10일 히틀러는 이른바 아르덴 공세를 취하기 위해 준비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동프로이센에 있는 전시 본부 늑대의 성채에서 머물던 히틀러는 12월 7일 최종 공격 안을 승인했고,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서부전선의 독일군대는 최종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 작전 지도
독일군의 6호 전차: 당시 독일의 탱크는 미군보다 성능이 좋았다.
1944년 12월 15일 당시 벨기에의 숲을 따라 형성된 아르덴 전선에는 6개의 미군 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이 가운데 3개 사단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부터 여러 전투를 치르며 지쳐있는 상태였고, 다른 3개 사단은 새로 배치된 부대였다. 이 지역의 전선은 1944년 10월부터 거의 2개월간 양측 모두 휴전상태에 들어간 상태였고, 12월엔 추운 겨울까지 맞이하여 양측 모두 다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었다. 거기다 방어하던 미군 병력은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9,000명의 사상자를 낸 이후 아르덴에 보내진 사단이었다. 그 당시 노르망디를 지휘한 미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나 사막의 쥐라는 별명을 가진 버나드 몽고메리 둘 다 독일군이 아르덴을 공격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다 벨기에의 침엽수림인 아르덴 숲은 독일군의 주력 군대인 전차가 다니기엔 적합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런 지역을 독일군이 전차를 동원하여 돌파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벌지 전투 상상화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의 생각과는 달리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아르덴에서 공격을 준비했다. 나치 독일은 이 당시 25만 명의 병사와 수천 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했다. 아르덴에 간 독일군은 12월 15일 자정에 공격 지점에 집결했으며, 집결한 독일군은 야전원수 룬트슈테트와 동부전선에서 활약했던 발터 모델 장군 그리고 전차부대를 지휘하는 발터 폰 만토이펠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12월 16일 아르덴 전선에 집결한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공격을 감행한 독일군은 1940년 이른바 서부전선 전역에 걸쳐 감행했던 전격전(Blitz Krieg)을 감행하여 휴식상태에 있던 미군들을 놀라게 했다. 독일군이 공격을 가하자 저항하던 미군은 결국 거센 공격에 밀렸다.
Stg 44 돌격 소총을 들고 있는 독일군
벌지 전투 공세 2일째 되던 날 미군은 독일 무장 친위대 기갑사단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막아내긴 했으나, 결국 18일 날 미군이 지키던 북부 전선이 돌파당했다. 그 당시 미군을 지휘한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2개의 기갑사단을 지원부대로 급파하라고 지시했지만, 소용없었다. 북부전선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기뻐 날뛰며 12월 18일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고자 했다. 히틀러는 “독일 군대가 디시 진격하고 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지도자에게 다시 안트베르펜 시를 선물로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군의 진격이 벨기에의 도시 바스토뉴까지 진격할 것이라는 것을 히틀러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덴 공세의 소식은 프랑스 정부에게 다시 한번의 공포를 각인시켰다. 왜냐하면 4년 전 경험했던 1940년의 경험을 절대로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군의 몽고메리 장군은 12월 20일 앞서 언급한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독일 측 기갑군을 막는데 투입되었고, 영군군은 조지 패튼의 전차 부대가 오기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제101 공수사단: 미국 드라마 밴드오브브라더스에서 주인공들이 속해있는 부대가 바로 이 부대다. 부대 마크는 흰머리 독수리다.
참호속에 있는 공수부대원들
바스토뉴에서 사진을 찍은 공수부대원들
벌지 전투가 격렬해지자, 미군 사령부는 자신들의 최정예 부대를 전투에 투입했는데, 그게 바로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에 나온 101 공수사단이었다. 독일군에게 있어 벨기에의 바스토뉴는 점령해야 할 거점이었다. 그러나 12월 19일 급속도로 투입된 미군 제101 공수사단은 바스토뉴를 독일군이 차지하지 못하도록 진지를 구축했다. 101 공수사단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마켓가든 작전 등에서 활약한 베테랑 병사들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전차와 싸울 장비를 조금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거기다 이들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바스토뉴는 독일군의 격렬한 포위를 받고 있었다. 바스토뉴를 대상으로 한 포위전에서 독일군은 맹렬한 포격을 이 도시에 퍼부었다. 여기에 투입됐던 공수부대들도 독일군 포격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 이는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잘 묘사된 바가 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벌지 전투에서도 미군을 지휘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바스토뉴에서 포위전이 격렬해지자, 독일군은 미군에게 ‘항복요청’을 보냈다. 독일 측의 항복 요청에 대한 미군 제101 공수사단 지휘자인 맥컬리프 준장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Nuts!’, 즉 우리말로 하자면, ‘미친놈!’, ‘또라이!’, ‘개념 상실!’을 뜻했다. 맥컬리프의 이런 반응은 항복 요구를 보냈던 만토이펠과 같은 독일군 장성들을 화나게 했지만, 미군 지휘관과 사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측 항복 요구가 있던 다음날 날씨가 좋아지면서 미군의 C-47 수송기가 바스토뉴에 포위된 병사들에게 보급 물자를 대량으로 공급했다. 공급 물자를 받은 부대는 다시 반격에 나섰고, 어느 시점에서 전세는 다시 연합군에게 유리해져 있었다. 바스토뉴를 포위했을 때, 만토이펠의 전차부대는 그 지역을 점령하려 했는데, 사기를 회복하고 지원병력과 물자보급까지 받은 미군의 반격을 받은 만토이펠은 바스토뉴를 점령하지 못했다.
미군의 M4 셔먼전차
194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패튼 장군의 미군 기갑사단이 대량으로 진격하면서 만토이펠이 이끈 전차부대들이 분쇄됐다. 영국의 군사사학자 존 키건에 따르면, 12월 26일 아이젠하워 사령부는 항공부대를 개입시켰고, 패튼의 기갑사단을 투입하여 바스토뉴에 포위된 제101 공수사단을 구출했다. 그리고 그날 독일 기갑사단의 선두 전차들을 박살 냈는데, 독일 기갑병력은 이날 미군과의 교전에서 전차 88대와 돌격포 28대를 잃었다. 사실 이 당시 독일군은 최신 전차인 6호 전차를 투입했는데, 이게 바로 티거라 불리는 신형전차였다. 놀랍게도 이 전차는 미군의 주력 전차인 M4 셔먼보다 훨씬 파괴력 및 성능이 좋았으며, 영국군의 마틸다나 크롬웰 그리고 크루세이더 보다도 당연히 훨씬 좋았다. 즉, 전차에 있어서 독일이 미국과 영국보다 더 앞섰던 것이다.
제101 공수사단의 진격을 그린 상상화
벌지 전투는 1945년 1월에도 지속됐다. 몽고메리의 영국군은 1월 3일 독일군이 있는 북쪽 측면과 서쪽 측면을 공격했고, 이 때문에 히틀러는 나흘 뒤 결국 선두에 세운 4개 기갑사단에게 퇴각명령을 내렸다. 미군 제82 공수사단과 제101 공수사단 그리고 영국군 제1 공수사단은 1월 16일에 전선을 원상복구시켰다. 전투는 12일 더 지속되었으며, 독일군이 후퇴하는 동안에도 추격하는 영미 연합군이 피해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아르덴 대고세 즉 벌지전투는 1월 28일에 종결됐다. 흥미롭게도 이 당시 독일은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무장 친위대 병력을 연합군 진지선 뒤로 침투시켰다. 이 때문에 프랑스 파리까지 경계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또한, 무장 친위대 병력 중 요하임 파이퍼가 지휘한 병력은 미군 포로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83명을 학살했고, 민간인 93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게 바로 말메디 학살이다.
콜오브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 FPS 게임인 콜오브듀티 시리즈는 이 전투를 다룬 적이 있다.
2개월간 지속된 벌지 전투는 양측이 붙었던 대규모의 군사작전이었고 양측 모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군 또한 꽤나 많이 전사하여 전사자가 대략 2만 명 가까이 됐다. 대략 6만 명의 미군이 부상당했고, 이에 따라 미군 사상자를 8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탱크 800대가 파괴됐고, 항공기도 1,000대나 잃었다. 이중 650대는 12월 당시 전투에서 잃었다고 한다. 독일 측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독일군은 총 40만 명을 전투에 투입했는데, 이 중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를 세분화하면 전사 2만 5,000명에 포로 및 실종 2만 7,000명 그리고 부상자 41,000명이다. 존 키건에 따르면, 전투에서 독일군은 전차 800대와 항공기 1,000대를 잃었다. 반면에 영국군 사상자는 1,500명 정도였다.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음에도 패배했던 이유는 미군의 보급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독일군을 지휘해야 할 전투 장교들의 부재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독일군의 많은 장교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략전술의 문제도 들 수 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군 진격의 대명사였던 전격전은 이미 연합군이 전략상 간파한 상태였다. 즉 벌지 전투는 독일군의 이런 모순들이 겹치고, 히틀러가 승리하겠다는 개인적 욕심이 겹치며 패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벌지 전투 이후인 1945년 2월 아이젠하워의 군대는 전선 전체에 걸쳐 전진하여 베젤과 코블렌츠 사이에서 라인 강에 도달했다. 즉, 독일 본토로 들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