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와 그들(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당시 미국 지도부)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s)가 있다고 말했지만, 대량살상 무기 같은 건 없었고, 부시와 그들은 그런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량살상 무기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2016년 2월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에서 당시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한 말이다. 비록 도널드 트럼프가 한 말이지만, 이는 사실이었다. 2003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여 그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이라크 어디에도 미국이 말한 대량살상무기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흑색선전을 퍼뜨렸다. 이는 국내에도 비슷하게 보도가 됐다.
예를 들어, 2000년 KBS 뉴스는 ‘사담 후세인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이라는 보도를 통해,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UN 금수조처로 피폐해진 이라크 경제현실만 취재하겠다고 속여 후세인 사생활을 촬영할 수 있었는데 결국에는 탄로가 나 급히 이라크를 탈출해야만 했습니다.”와 같은 소식을 전했다. 즉, 언론들은 후세인에 대해 인민들은 굶어 죽어가지만, 자기 혼자 사치를 부리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후세인은 미국이 만든 존재였다. 오늘은 후세인이 어떻게 미국의 지원을 받았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후세인은 반대파 숙청과 쿠르드족 학살 등으로 잔혹한 통치로 유명하지만, 다른 한편 산업기반 국유화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2003년 미국의 부당한 침공으로 살해됐다.
사담 후세인은 1937년 이라크 왕국 티크리트에서 태어났다. 후세인은 아버지가 불분명한 결손가정에서 자랐다고 하며, 오죽하면 그의 어머니가 매춘부가 아니냐는 중상모략도 있을 정도다. 젊은 시절 후세인은 이라크 로스쿨에서 3년 동안 수학했으며, 당시 이집트의 나세르가 아랍 사회주의를 주창하자 이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라 후세인은 젊은 시절 바트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1959년 CIA 등의 지원으로 시도된 카심 대통령 암살공작이 불발로 끝나자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1963년 카심 정부가 전복된 해에 귀국하여 바트당의 비서직을 맡았다. 그러나 후세인은 쿠데타 군부 내의 권력투쟁에 밀려 곧 수감되고 구금 상태에서 탈주하여 1968년 쿠데타로 권력을 쥘 때까지 바트당을 이끌며 지하활동을 했다.
1968년 미국의 지원 아래 사담 후세인은 청년장교단의 일원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이후 혁명평의회 부의장을 거쳐, 1979년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가 집권하자마자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게 바로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당시 사담 후세인이 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내세운 명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이란의 영토였던 샤트 알 아랍 수로의 탈환이었다. 당시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지원한 목적은 분명했다. 첫째, 양국 사이의 영토 다툼을 통해 1979년 이란서 정권을 잡은 호메이니 세력을 약화 및 이들의 확장을 막는 것이다. 둘째, 그와 동시에 급증하는 석유 판매대금을 기반으로 중동의 맹주를 노리던 이라크의 영향력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미국이 노린 것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온갖 추잡한 전쟁을 전개했는데, 다른 한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여 이란을 약화시키는 데도 열정적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 동안 진행됐고, 양측에서 100~150만 명이 죽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후세인 정부에게 첨단무기와 생화학 무기 그리고 핵물질까지 공급했다. 식량을 포함한 재정지원도 했다. 이렇게 지원하라고 명령한 사람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생화학 무기 지원의 경우 미국의 전 국무장관이던 콜린 파월(Colin Powell)의 증언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2002년 9월 폭스 뉴스에 출연한 콜린 파월은 “당시에는 사담 후세인의 생화학 무기 사용을 방관했으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미국이 이라크에 생화학 무기를 지원한 사실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에 있었던 럼스펠드는 한때 후세인의 동맹자로써 후세인을 만난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친했지만, 이후 럼스펠드는 이라크 침공에 앞장섰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국이 지원한 생화학 무기는 사담 후세인이 자국 내에 있는 쿠르드족을 학살하는 데 사용됐다. 1988년 이라크 북부지역 할라브자시에서 후세인 정권은 쿠르드족 주민 5,000명을 화학무기로 학살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사용한 사실을 부정했다. 오히려 레이건은 이란을 비난했다. 물론 이란은 후세인이 저지른 이런 잔학행위를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 심지어 레이건은 후세인을 위해 “쿠르드족에 대한 화학무기 사용에 반대하는 의회의 성명”도 가로막았다. 과거 레이건 정부는 동맹국 이라크를 위해 이런 일을 했는데, 정작 2003년 침공 명분이 생화학 무기 및 대량살상 무기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다.
따라서 미국이 키운 존재인 사담 후세인은 미국 덕분에 이런 짓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미국의 적이 됐다. 왜 적이 된 것일까? 이유는 바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4개월 전인 1990년 4월 부시(아버지 부시를 의미)는 이라크에 대표단을 보내 후세인에게 안부를 전했는데, 이들은 사담 후세인의 위대한 업적을 치켜세우면서 그에게 미국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비판적인 논평은 무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걸프전쟁 당시 다국적군 군사작전 지도, 미국은 수십만 명의 병력을 전쟁에 동원했다. 물론 당시 미국의 목적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전의 굴욕을 만회하기 위함도 있었다.
걸프전쟁 당시 미군의 탱크, M1 에이브람스 탱크로 걸프전쟁에서 상당한 성능을 자랑했다. 당시 이라크군의 주력전차를 궤멸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쿠웨이트 상공을 선회하고 있는 USAF F-16A, F-15C & F-15E, 이 전투기들은 이라크을 폭격해서 말 그대로 도시를 파괴했다.
그러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는 급변한다. 미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1991년 1월 다국적군을 준비했다. 사실 당시 쿠웨이트 영내로 진입한 이라크군은 2,000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10만 명은 쿠웨이트와 접경지대인 바스라에 주둔했다. 물론 미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이유를 들어, “20~30만 명의 이라크군 병력이 쿠웨이트를 무자비하게 유린했다”라고 악선전을 했다. 결국 미국은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rom)을 개시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작렬하는 이라크의 사막, 폭격 현장에서 걸어가고 있는 낙타가 인상적이다.
죽음의 고속도로, 다국적군은 협정에 따라 후퇴하는 이라크군과 주민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대략 수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불과 6주 동안 이라크 전역에 막대한 폭탄을 투하했다. 당시 투하한 폭탄의 양을 파괴력으로 따지면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7배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클러스터 폭탄과 우라늄 미사일, 네이팜탄 등 1977년 제네바 협약에서 사용을 금지시킨 폭탄도 쏟아부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클러스터 폭탄이나 백린탄 등을 쓴다고 비난을 하는데, 사실 이거 미국이 훨씬 더 많이 사용했다. 이라크군 수십만 명은 미군의 폭격과 현대식 무기에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최소 수만 명 이상의 이라크군이 전사했고, 3,300대의 탱크와 2,100대의 장갑차 그리고 110대의 항공기가 파괴됐다. 반면에 다국적군 전사자는 292명이고, 탱크는 31대만 잃었으며, 전사자 중 미군 전사자는 150명도 안 됐다.
죽음의 고속도로에 있던 민간인을 표현한 그림
미국은 걸프전쟁 과정에서 또 다른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고속도로(Highway of Death)다. 이 고속도로에서 이동하던 군인과 난민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했는데, 이는 휴·종전협정을 이유로 철수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쟁범죄였다. 최소 수백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이 이 고속도로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했다. 대략 수천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추산일 것이다.
사실 미국은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 분명히 대화를 통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을 선택했다. 1990년 사담 후세인 정부는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을 깨달았고, 완벽한 굴욕만 피하면서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기 위해 미국과 합의를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걸 완벽히 무시한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심지어 후세인은 1991년 1월 당시 이라크가 거의 아무런 대가 없이 철수할 의지가 있음을 인정했었다. 따라서 전쟁을 원한 주체는 미국이었고, 미국은 걸프전쟁을 일으켰다.
1996년 텔레비전 방송에 출현한 울브라이트가 한 말, 실제로 울브라이트는 이라크인 아사자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미국 네오콘의 사고관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걸프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1차 침공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로 이어졌다. 미국은 UN을 통해 이라크에 경제제재를 가하여, 100~125만 명이 굶어 죽도록 만들었다. 아사한 이들 중 50만 명은 이라크의 어린이들과 영유아들이었다. 1996년 매들린 울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는 방송에 출현해, 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울브라이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그 희생이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때 자신들의 충실한 동맹국에게 이런 짓을 했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는데, 여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또 다른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게 바로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아는 이라크 전쟁이 2003년에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후세인은 미국에 의해 성장했고, 미국에 의해 철저히 버려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