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3월, 저는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가 지휘하는 괌의 공군 부대에 있었습니다. 우린 3월 어느 날 밤 10만 명의 도쿄 시민을 폭격으로 죽였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요. 결국은 제가 그 계획을 르메이에게 권했다고 봐야겠죠.”
2003년 미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인 ‘전쟁의 안개(The Fog of War)’에서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가 했던 증언이다. 존 F. 케네디 행정부 시절 국방장관을 지냈던 맥나마라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 전쟁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특히나 그는 전쟁을 수학적으로 통계화했다. 그 당시 맥나마라가 만든 통계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활용했다. 1930~40년대 UC 버클리와 하버드 대학교를 나와 최연소 최고연봉 조교수로 근무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항공대 대위로 임관했고, 전략 폭격(Strategic Bombing)으로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가 휘하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의 일본 본토 대공습을 진행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로버트 맥나마라: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녔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장교로 참전했다. 커티스 르메이 밑에서 군복무를 했던 그는 폭격의 숨은 설계자였다.
그 당시 맥나마라가 르메이 밑에 있으면서 진행한 폭격 작전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도쿄 대공습이다. 도쿄 대공습은 1945년 3월 10일 미 공군이 감행한 무차별 폭격이었다. 우선 도쿄 대공습을 이야기하기 전에 태평양 전쟁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됐다.(물론 제2차 세계대전 시작점에 대해선 시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관해 논란이 있긴 하다.) 미국은 27개월간 중립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나치 독일의 군대가 미국의 동맹국 영국을 폭격하고, 또 광활한 소련을 침공했을 때도 미국은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 12월이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바로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미군 2,4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부상당했으며, 애리조나호와 오클라호마호를 비롯한 전함 8척이 침몰 및 손상당했고, 순양함 3척, 군함 4척을 잃었다. 항공기 188대가 파괴됐으며, 민간인 100명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미해군의 최고전력이라 할 수 있는 항공모함 3대를 파괴하지는 못했다. 당시 미항공모함 3대는 하와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격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미국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
진주만 기습 공격을 잊지 말자는 미국 측 선전 포스터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은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현재 미얀마),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단기간에 점령했고, 더 나아가 태평양의 중간인 미드웨이와 미국령 알래스카 주의 알류샨 열도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으면서 전황의 주도권을 잃게 됐다. 1943년 과다카날 전투에서도 대패하면서, 일본은 영미 연합군에게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던 1944년 6월부터는 미군이 일본의 도시들을 공습하게 됐다. 특히나 1944년 7월 미군이 사이판 섬을 장악하면서 일본 본토 공습이 보다 수월해졌다. 그렇게 되면서 미국은 일본 본토 전역을 폭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45년 3월 10일 미군은 일본의 수도 도쿄를 공습했지만, 사실 미국은 일본의 수도 도쿄를 이미 3년 전에 공습한 적이 있었다. 1942년 4월 18일 미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B-25 폭격기 16대가 일본의 수도 도쿄에 폭탄을 투하했으며, 가옥 262채 파괴, 제철공장 1곳, 석유저장소 1곳, 발전소 몇 곳을 파괴했다. 공습으로 사망자 50명을 포함하여 총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흥미롭게도 미군의 공습을 그 당시 일본 도쿄에 있던 유명한 조선인 한 명이 목격했는데, 그가 바로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던 몽양 여운형이었다고 한다. 이를 목격한 여운형은 이후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일본을 폭격하기 이전 이미 독일과 이탈리아를 폭격한 경험이 있었다. 특히나 독일의 경우 1943년 함부르크 공습으로 3~4만 명의 독일 민간인을 죽였고, 1943년부터 1944년 1년 동안 로마를 공습하여 총 4만 명의 로마 시민이 죽기도 했다. 그 외에도 독일이 점령한 지역 곳곳을 폭격했고, 1943년과 1944년에 수도 베를린도 주기적으로 공습했었다. 영미 연합군의 공습으로 베를린에서도 대략 2만 명에서 5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따라서 그 당시 미국의 공습으로 적잖은 추축국 민간인이 사망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B-29 폭격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신형 폭격기인 B-29는 1944년부터 일본 본토 공습에 동원됐다.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항공기로도 알려졌다.
당시 미국이 독일과 이탈리아를 공습하면서 사용했던 폭격기 기종은 B-17 폭격기였다. 1930년대부터 미국이 개발한 신형 폭격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럽 본토를 말 그대로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1944년부터 미 육군 항공대에는 최신형 폭격기가 배치되어 투입되었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B-29 폭격기다. B-29는 그 당시 등장한 폭격기들 중에 가장 큰 기종이었고, 방어 능력도 좋았기에 ‘날아다니는 요새(Flying Super Fortress)’라는 별명도 붙었다. 폭탄도 대략 60,000kg을 실을 수 있었고, 전쟁 기간 총 4,000대가 생산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의 공습 작전을 지휘한 커티스 르메이는 미군 내에서 전공을 인정받아 1945년 1월 사령관 자리까지 승진했다. 커티스는 말 그대로 전쟁을 가혹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철학을 신봉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민간인과 군인 할 것 없이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네이팜탄 공습으로 비무장 민간인들을 불태워 죽이는 것을 꺼리는 부하들에게 르메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고한 민간인(innocent civilians)은 없다. 이른바 죄 없는 방관자(so-called innocent bystanders)도 없다.”
커티스 르메이: 무차별 폭격을 실전에 도입한 인물이다. 전쟁범죄인 그의 폭격행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반복됐다.
르메이는 자신이 계획한 폭격으로 죽는 사람이 민간인인 것을 너무나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즉, 그런 전제를 바탕으로 르메이는 폭격 작전을 수행했던 인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1945년 3월에 있을 도쿄 대공습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학살극이 될 운명이었다. 미군은 이미 1943년에 유타 사막에다 일본식 주택을 본뜬 마을을 만들어 네이팜탄으로 불태우는 실험을 했었다. 1945년 3월 9일 밤 사이판과 티니안, 그리고 괌 섬에서 최소 300대 이상의 B-29 폭격기가 출격했고, 다음 날인 3월 10일 새벽 일본의 수도 도쿄에 도달했다. 도쿄에 도달한 폭격기들은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폭탄이 도쿄 상공에 투하되자, 일본 제국의 수도 도쿄는 말 그대로 불바다가 됐다. 이 당시 도쿄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의 눈에 지옥도가 펼쳐진 것이다.
일본 도쿄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있는 B-29 폭격기
일본 후지산 상공을 날고 있는 미군 B-29 폭격기 편대
네이팜탄이 투하되면서 사실상 수도 도쿄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네이팜탄의 성분은 닿기만 하면 불이 붙었는데, 일본 도쿄의 거주지들을 목재였기에 더더욱 불이 잘 붙었다. 폭격을 받은 일본 민간인들은 참혹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당연히 여성·아이·어린이를 가리지 않았다. 공습을 받은 엄마들은 아이를 업고 도망치다가 아이의 머리가 불타는 것을 봐야 했고, 집에서 공습을 받은 사람들은 불지옥을 경험하며 고통스럽게 죽었다. 거기다 화염은 산소를 빨아들여 적잖은 사람을 호흡 곤란을 일으켜 죽였다. 화재가 너무나도 심각해 불에 타 죽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은 시내 가운데를 흐르는 스미다 강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는 도중 사람들과 부딪쳐 죽거나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의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2021년에 쓴 ‘The Bomber Mafia’를 보면 다음과 같은 미군 항공병들의 증언이 나온다.
“그 작전에 참여했던 승무원들은 큰 충격에 빠진 채 돌아왔다. 항공병 데이비드 브레이든은 이렇게 회상했다. 솔직히, 불타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 지옥 입구를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불이었죠. 항공병 콘래드 크레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상 1.5km 정도로 비행고도가 낮았습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비행기 안에 스며들 만큼 낮았죠. 실제로 마리아나 제도에 돌아와서 훈증 소독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타는 냄새가 항공기 안에 남아 있었거든요”
도쿄 상공에 투하되고 있는 폭탄
심지어 당시 폭격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는 B-29 폭격기가 도쿄 상공을 낮게 선회하면서 민간인들에게 기총소사를 퍼부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애초에 르메이가 계획한 이 공습은 적국 도시 80% 이상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구상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도쿄 대공습으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지역은 도쿄 스미다 강변의 아사쿠사, 혼조, 후카가와 일대였는데, 노동자나 소상공인들이 모여 살던 서민동네였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존 다우어 교수는 “도쿄 대공습 당시 빈민 거주지나 작은 상점들, 그리고 수도의 공장지대는 상당 부분 불타버렸지만, 부유촌으로 이뤄진 멋진 주택가는 그대로 남아 점령군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저서 ‘Embracing Defeat’에 서술했다. 도쿄 외국어대학교 교수인 사카사이 아키토는 당시 미군이 왜 저소득층을 공습했는지 다음과 같이 책에 집필했다.
무차별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도쿄의 모습
“미 육군 항공군(USAFF)의 폭격 전략에 관한 최근 연구에서, 작전 입안자들이 노동자 집단 거주 지역을 공격하여 전시 노동력을 감소시킴으로써 총력전 체제를 약화시킬 전략을 세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 사회 내부의 빈부격차가 그대로 공습으로 인한 피해 확률로 이어졌다. 달리 말하자면, 농촌으로 소개할 여유와 사회적 인맥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도시에 머무를 수밖에 없던 사람들보다 전재(戰災)를 입을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
일본 도쿄 대공습은 6시간 동안 지속됐다. 6시간 동안 총 19만 발의 폭탄이 투하됐고, 41km² 면적이 피해를 입었다. 연기는 하늘로 7.6km 높이까지 올라갔고, 240km 밖에서도 도쿄의 화염이 보였을 정도였다. 공습으로 인해 대략 27만 채가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 대공습 당시 미군의 당일 공습으로 죽은 일본 민간인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쟁 이후 미국 스스로가 한 미국전략폭격조사 보고서의 자체 추산에 따르면 87,793명이 사망했고, 40,918명이 부상당했으며 100만 8,005명이 집을 잃었다. 보통의 경우 1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추정치의 경우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로즈(Richard Rhodes)의 추산인데, 그의 추산에 따르면 사망자 10만 명과 더불어 부상자가 100만 명이고, 또 다른 1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사망자와 부상자 수치만 보더라도 참으로 소름 끼칠 정도다.
도쿄 대공습으로 불에 타 죽은 민간인 시신들
소이탄 공격으로 불에 탄 민간인 시체: 죽은 사람은 엄마와 아이로 보인다.
대량으로 쌓인 민간인 시신들: 사진으로만 봐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도쿄 소방청의 경우 97,000명이 사망하고, 12만 5,000명이 부상당했다고 추산했지만, 도쿄 경찰 측 추산치를 보면 12만 4,711명이 죽고, 12만 5,000명이 부상당했으며, 28만 6,358채의 건물과 집들이 파괴된 것으로 나온다. 미국의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의 경우 12만 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으며, 그것보다 더 높은 추정치는 20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 최소 추정치가 7만 5,000명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도쿄 대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추정치는 7만 5,000명에서 20만 명이라 할 수 있다. 당일 공습으로 이 정도의 추산치가 나온다는 점과 이러한 결과를 미군 지휘부가 알았다는 것을 감안하자면, 도쿄 대공습은 말 그대로 대학살이었다.
도쿄 대공습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일본 민간인들
폐허가 되어버린 도쿄의 모습
상공에서 찍은 도쿄 상공의 모습: 폭격으로 수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쿄 대공습 이후에도 미국은 일본 본토 전역을 폭격했다. 미군은 그해 3월에 나고야·오사카·고베를 폭격했고, 6월 이후에는 중소도시들까지 불태웠다. 이러한 공습으로 일본 민간인 100만 명이 사망했다. 글쓴이는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지만,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자행한 공습에 대해 학살이라는 관점을 잘 갖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1945년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을 생각하면, 이것이 민간인 학살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 공습으로 죽은 사람은 단순히 일본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도쿄에 살던 조선인 1만 명도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도쿄 대공습 사망자가 10만 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희생자 10%가 조선인이었다는 얘기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자행한 도쿄 대공습은 변론이 불가능한 민간인 학살이고 전쟁범죄다. 아무리 일본이 싫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