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도모르가 스탈린의 의도적인 제노사이드?’
(이 글은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목적하에 연재하게 된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공부한 것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짧게 정리하며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번 우크라이나 대기근 관련 글을 생각보다 많이 길어졌네요. 워낙 반박할 거리들이 너무 많아서요.ㅎㅎㅎㅎㅎ)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서구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을 악마화하는 행동에 착수했다. 지난 2024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게시된 지 80주년이 되는 해였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오늘날 우리 대륙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 그들이 싸웠던 모든 것을 다시 도전받는 상황, 무력으로 국경을 바꾸거나 역사를 다시 쓰려는 사람들에 맞서 이곳에 상륙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자”며 러시아를 겨냥한 발언을 기념행사에서 했다. 사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서구가 제2전선을 구축한 것은 1941년 말부터 스탈린이 영국 그리고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미국에게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맥락은 현재 집단 서방이 무시하고 있는 역사적 팩트다.
마찬가지로 집단서방은 또 악의적으로 소련 및 스탈린 시절에 대해 악의적인 왜곡을 일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발생시켰고,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를 말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근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스탈린 시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기근을 이른바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한다.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어로 ‘기아에 의한 죽음’ 혹은 ‘기아에 의한 살인’을 의미한다. 용어부터가 의도적인 학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러우전쟁이 한참이던 2022년 11월 독일의 슐츠 정부는 홀로도모르를 이른바 러시아의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이와 같은 행동은 현재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집단 서방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고, 실제로 그들은 러시아를 비난하기 위해 이 역사적 소재를 악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홀로도모르라는 역사적 사건이 도대체 뭐길래 이들은 이렇게 이용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홀로도모르는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일어난 기근을 뜻한다.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에서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했고, 스탈린은 1928년 이후 이른바 제1차 5개년 계획을 실행하여 공업화를 진행했다.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으로 서방 경제가 휘청거릴 때, 소련은 연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달성했고, 또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토대를 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농촌에서 터졌다. 공업화를 수행하며 소련은 농촌에서 집산화를 실행했다. 집산화 과정에서 과거 신경제정책(NEP)를 통해 성장한 부농의 재산도 몰수했다. 몰수당하는 것을 거부한 부농은 자신들이 소유한 농장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했는데, 이것이 결국 기근으로 이어졌다. 즉, 집단서방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가 소련의 의도적인 계산이었던 것이고 우크라이나인들을 의도적으로 학살하기 위해 벌였으며, 이에 따른 기근도 인위적인 조장이라는 얘기다. 결국 기근이 발생했고, 1년간의 기근 사망자는 최소 50만 명에서 많게는 1,500만 명까지 추정한다.
이 당시 발생한 기근은 국제적으로도 이슈가 됐고, 서구 사회에서 영화로도 제법 많이 만들어졌다. 항상 소련과 러시아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을 비난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됐다. 또한, 유튜브에 한글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검색하면 스탈린과 러시아를 비난하는 영상들이 무수히 많다. 벌거벗은 세계사에 자주 등장하는 한 미국사 전공 교수 또한, 이런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사실 홀로도모르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보다 더했어요.”와 같은 주장도 했다. 필자는 이런 주장을 보며 말 그대로 어이를 상실한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와 같은 서구의 주장에는 허점도 많고 사실 왜곡도 많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이 기근은 단순히 우크라이나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 전역을 강타했다. 카자흐스탄에서도 기근이 발생했다. 단순히 우크라이나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앞서 언급한 쿨락의 일탈행위는 계급투쟁적 성격도 지녔었다. 그 당시 쿨락은 보다 많은 농토와 가축을 소유하고 있었고, 1921년부터 실행된 신경제정책으로 이득을 본 이들이었다. 사실 이들의 경우 대다수가 과거부터 부농이었던 이들이었다. 따라서 이들과의 싸움은 계급투쟁적인 측면이 있었다. 역사학자 루도 마르텐스에 따르면, 실제로 집산화에 맞선다며 쿨락들은 집산화를 사보타지하기 위해, 그들은 농작물에 불을 지르고, 헛간, 주택, 그리고 다른 건물에 방화를 했으며, 투쟁적인 볼셰비키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했다. 이런 행위를 통해 쿨락이 중농들을 자극했다는 얘기다. 1930년 소련의 시베리아의 경우 1월부터 6월까지 쿨락들에 의한 테러 행위가 최소 1,000건 이상 발생했다. 즉, 이런 과정에서 이들에 맞선 투쟁이 벌어졌다. 참고로 그 당시 저항했던 부농은 인구의 10%였고, 농촌의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거기에 엎친데 덥친 격으로 자연재해까지 일어났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 교수인 마크 B. 타우거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기근이 소련 정부의 인위적인 정책으로 인한 것이 아닌 악조건에 놓여있던 환경상황에 의한 것 즉,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루버 퍼에 따르면, 소련의 제1차 공식자료에 따르면 1928년에서 1929년 당시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이 소련에서 있었다. 당시 기근이 번진 우크라이나의 경우 소련 정부로부터 다른 지역들 보다 원조를 받았다는 얘기다. 여기서 마크 타우거 교수의 자료를 보다 상세히 인용할 필요가 있다.
서구에 알려진 내러티브는 스탈린이 기근 사실을 숨기며 곡물수출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적인 진실이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스탈린과 볼셰비키 정부가 이를 구제하려는 정책을 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타우거 교수에 따르면, 소련 정부는 곡물을 적게 비축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다수의 민중들에게 끊임없이 식량을 공급하는 데에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곡물 수출의 경우 1932년 470만 톤이었던 것이 160만 톤으로 급격히 축소되었다. 기근 발생 이후 스탈린은 곡물 수매량의 목표치를 4배로 줄였고, 1932년 5월에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130만 톤이 감소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수매량에서 10% 이상의 비중을 점했던 65만 6천톤으로, 1932년 10월에는 115만 톤이 추가적으로, 그리고 1933년 1월에는 45만 9천 톤으로 줄어들었다.
아무튼 1932년 5월 이후 일련의 조치들에서 스탈린은 굶주리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요구에 응답하여 곡물의 수매량을 감축한 것이다. 심지어 반공주의 성향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마저도 본인이 쓴 스탈린 전기에서 “스탈린이 1932년 8월부터 우크라이나에서 징발할 곡물의 양을 줄었다. 그의 승인에 따라 정치국은 할당량을 반으로 줄여 고통을 덜어주었다. 1933년에 수확이 끝난 뒤에는 볼가 강 유역과 우랄 지방, 카자흐스탄에서도 조달할 양을 낮췄다.”고 썼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소련 공산당이 기근 구제정책을 적극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홀로도모르를 스탈린이 의도적인 제노사이드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오히려 스탈린이 우크라이나를 위해 많은 것을 했음을 보여주는 근거는 많이 있다. 1929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회주의적 산업화를 통해 실업을 일소했고, 1932년에는 우크라이나에 전기를 보편적으로 공급해주기 위해 드네프르 수력 발전소를 건설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 시절 만든 전력 발전소 덕분에 전기를 사용하는 데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거기다 1926년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2,900만 명이었지만, 1959년에는 3,7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스탈린 통치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800만 명이 증가했다.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1933년 이후 증가하여 3,100~3,400만 명 선을 유지했다.
그 외에도 사진 조작도 서구에서 판을 쳤다. 이에 관해 연구한 더글라스 토틀의 경우 1987년 서구에서 개봉한 홀로도모르 관련 영화 ‘절망의 추수’에서 “1921년에서 1922년 볼가 기근(Volga Famine) 당시의 사진.”을 이용하여 홀로도모르로 왜곡했다고 책에 썼다. 또한, 말이 굶주린 것으로 알려진 사진도 사실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진이었다. 그러나 서구 언론은 이를 우크라이나 대기근인 것처럼 활용했다. 또한, 미국의 억만장자이자 아돌프 히틀러와 매우 협력적인 관계였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신문사가 그 당시 이를 잘 활용했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1934년 여름에 나치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독일이 허스트 소유의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International News Service)사의 국제 뉴스를 구매하겠다는 계약을 맺었으며, 당시 나치 출판물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한 흑색선전을 했다.
사망자 숫자도 매우 과장됐다. 그리고 그 숫자들은 나치를 추종하는 파시스트들과 서구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됐다. 예를들어, 우크라이나 대기근에서 700만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출처가 니콜라스 프리초드코(Nicolas Prychodko)라는 인물이다. 그는 키예프에서 나치가 통제한 '문화 교육 장관'을 위해 일했던 나치 협력자였다. 1933년 당시 600만 명이 우크라이나에서 아사했다는 것도 원 출처는 나치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였다. 즉, 이와 같이 믿을 수 없는 이들의 주장을 출처로 삼아 홀로도모르의 아사자 수치를 의도적으로 서구가 과장했다. 1,000만 명이 죽었다거나 1,500만 명이 죽었다는 주장도 전부다 그런 식으로 부풀려진 사례였다. 물론 기근으로 아사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러시아 측 사료와 그 당시 우크라이나에 파견됐던 월터 듀런티나 랄프 바네즈의 추정을 토대로 보자면, 50~300만 명 선으로 보는 것이 아마 현실적일 것이다. 필자는 50~200만 명 선으로 보고 있다. 물론 기근 자체는 참혹했다. 그러나 이걸 마치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제노사이드로 보는 건, 잘못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 정리해봤다. 그리고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탈린이 강행한 집산화 이후 더 이상 이런 기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우거 교수는 “1930년대 당시의 대규모 수확, 이 시기의 소련 농장의 기계화, 소련인구 증가, 소련 시대의 식량 생산과 소비의 장기간 증가 등”의 역사적 사실을 서구가 축소하거나 실제 수확 자료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집산화가 강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책은 소련의 전통적 농업에 실질적인 현대화를 가져왔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상대적으로 높은 식량 생산량과 소비의 기반을 닦았다. 이것이 핵심이다. 거기다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파시스트들은 기근이라는 것이 소련 시대보다 제정 러시아 시절 훨씬 더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무시한다. 따라서 필자는 홀로도모르 제노사이드론이나 이를 통한 스탈린 비난이 집단서방의 위대한 사기극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집산화에 대한 루도 마르텐스의 평가를 길게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집산화의 여러 단계 동안 650만 명의 꿀락들이 대학살을 당했다는 콘퀘스트의 주장에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범주 I의 반혁명론자들인 6만 3,000명 중 일부만이 처형되었다. 주로 굶주림과 전염병에 의해 이송 도중 죽은 사람의 수는 대략 10만 명이었다. 1932년부터 1940년 사이에, 우리는 자연적인 원인으로 이송지에서 20만 명의 꿀락들이 죽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형과 이러한 자연적인 사망은, 러시아 농촌지역에서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계급투쟁의 시기에 일어났고, 이 투쟁은 낙후되고 원시적인 농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엄청난 대격변 속에서, 1억 2,000만의 농민들이 문맹과 반계몽과 중세에서 벗어났다. 착취와 비천하고 비인간적인 노동과 그러한 생활을 여전히 유지하고자 원했던 이들은, 일격을 당한 이들은, 바로 반동 세력들이었다. 집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계급과 반동들에 대한 억압이 절대로 필요했다. 오직 집단 노동만이 사회주의적 기계화를 가능하게 하였고, 그래서 농민 대중을 자유롭고, 자랑스럽고, 교육 받는 삶으로 인도 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들의 증오로 인해, 서구의 지식인들은, 650만 명의 꿀락들이 절멸당했다는 콘퀘스트의 어리석은 거짓말을 퍼뜨렸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제국주의자들의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모잠비크(Mozambique)에서, CIA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안대가 조직한, 레나모(Renamo)는 1980년 이래로 90만 명의 마을 사람들을 대략학살하고 굶어죽게 했다. 이것의 목적은, 모잠비크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독립된 국가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서구의 지식인들은 모잠비크에서 시체들을 날조할 필요가 없었고, 그들이 할 필요가 있었던 모든 것은 제국주의의 잔학성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90만 명의 죽음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또한 CIA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재정지원과 후원을 받는,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유니타, Unita)은, 앙골라해방 인민운동(MPLA) 민족주의 정부와의 내전 기간에, 100만 명 이상의 앙골라인(Angolans)을 죽였다. 1992년에 선거에서 패배한 후, CIA 인물인 사빔비(Savimbi)는 다시 또 파괴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앙골라의 비극은 300만 인민의 생명을 위협했다. 사빔비는 129석 대 91석으로 정부가 승리한 선거의 결과를 거부하고 최근 열두달 동안 또 다른 10만 명의 생명을 빼앗은 잔인한 충돌로 다시 또 앙골라를 몰아갔다." 물론 10만 명의 아프리카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전히 집산화에 대해 비명을 지르는 것을 좋아하는 얼마나 많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국가들의 진정한 독립과 국제 자본의 지배로부터의 탈출을 막기 위해, 서방이 200만 명의 모잠비크와 앙골라 농민들을 대량학살 했다는 것을 결코 지적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