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굴라그=나치 죽음의 수용소?'
(이 글은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목적하에 연재하게 된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공부한 것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짧게 정리하며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퍼진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미지는 폭압적인 독재자적인 이미지 혹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무자비한 대량 학살자의 이미지일 것이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 그가 지원한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내러티브가 지배적이기에 항상 스탈린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섞는다. 서구 사회의 경우 소위 한나 아렌트식 전체주의론에 입각하여 그를 히틀러와 비슷한 악인으로 묘사한다.
아주 심각한 경우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 보다 더 악랄한 인물로 묘사하는데, 대표적으로 반공주의와 반러주의가 강한 동유럽 국가들이 그러하다. 적잖은 사람들이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얘기하면 그가 2,000만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참고로 최소 2,000만 명 이상 학살했다는 주장은 영국의 반공학자 로버트 콘퀘스트가 출처다. 그 외에도 4,000만 명을 학살했다거나 6,000만 명을 학살했다는 내러티브는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를 집필한 피에르 리굴로나 반공을 위해 데모사이드(Democide)라는 개념을 창시해낸 극 네오콘 루돌프 럼멜이 한 주장이다. 피에르 리굴로(Pierre Rigoulot)나 루돌프 럼멜(Rudolph Rummel)은 콘퀘스트의 통계를 더 부풀려 사망자 수치를 조작해냈다.
중국사 연구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홍콩대 교수인 프랭크 디쾨터(Frank Dikötter)는 마오쩌둥 시기 전개된 대약진 운동으로 최소 4,500만 명에서 6,000만 명이 아사했다고 주장했는데, 그가 추정한 수치는 <폴포트 평전>의 저자이자 <마오 전기>의 저자인 필립 쇼트(Phillip Short)가 체계적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약진 운동의 아사자 수치가 서구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주장은 조셉 볼(Joseph Ball)의 글 "마오는 대약진 운동 시기 정말로 수백만 인민들을 학살했는가(Did Mao Really Kill Millions in the Great Leap Forward)?"를 읽으면 된다. 노사과연에서 2021년에 한글로 번역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구글에 검색해 보길 바란다.
다시 얘기를 스탈린으로 돌리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오시프 스탈린 시기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지극히 과장되었고, 맥락이 생략된 채 무리하게 비난당하고 있으며, 서구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다. 우선 '스탈린 전체주의 사회=히틀러 전체주의 사회' 등식은 사실과 매우 거리가 멀다.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라는 서구학자는 스탈린의 굴라그 시스템을 히틀러가 배워 죽음의 수용소를 만든 것으로 봤다.
그러나 소련 시기 굴라그는 범죄자들을 교양 및 교화시키는 곳이었지, 나치처럼 한 인종을 대량 학살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앞서 언급한 반공학자 로버트 콘퀘스트마저도 수감됐던 수감자의 최소 40% 이상이 스탈린 시기 석방되었다고 썼을 정도다. 즉, 수년 안에 대부분 석방했던 게 소련의 굴라그다. 또한, 수감자들 중 소위 스탈린에 대해 악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상과는 달리 정치범이 그리 많았던 것도 아니다.
소위 서방사회에서 유명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은 굴라그의 현실을 너무 심하게 과장했다. 소련사 연구로 유명한 아치 게티(Arch Getty)는 굴라그에 대한 서구의 주장이 어떤 식으로 퍼졌는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광범위한 분석의 일반화는 복도에서 우연히 들은 얘기나 내지는 사적으로나 할법한 험담이나 소문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굴라그 수용소에서의 일화(“내 친구는 니콜라이 부하린의 아내를 수용소에서 만났고, 부하린의 아내가 말하길...”)들은 소련 공산당의 중심적인 정치적 결정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자료가 됐다... 고립되거나 특별히 입증되지 않았던 일반화의 필요성은 유언비어들을 사료화 했으며, 확증편향된 이야기들도 이와 동일시해버렸다."
즉, 콘퀘스트나 솔제니친 등이 얘기한 굴라그에 대한 주장은 이런 식으로 부풀려지고 각색됐다는 얘기다. 특히나 굴라그에 대한 진상은 1985년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진행하면서 낱낱이 밝혀졌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빅토르 젬스코프(Victor Zemskov)의 연구에 따르면, "반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개,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 이주지는 425개가 있었다."
쉽게 말해 굴라그는 정치범과 살인범 그리고 일반 잡범을 명확히 구분했다. 또한 노동시간의 경우 8시간 노동제였다. 다만 전쟁을 치르던 시기인 1942년에서 1943년에는 보통 10시간으로 노동 시간이 늘었고, 심한 경우 12~15시간까지 굴리는 극소수의 수용소도 있었지만, 이는 전시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보통의 경우 전시에는 10시간이었다. 그리고 1945년 대조국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나고 난 이후엔 다시 7~8시간으로 조정됐다. 심지어 기밀해제된 미국 CIA 문서를 봐도 1950년대 초 굴라그 수감자들이 평균 7시간의 노동을 한다고 나온다. 또한, 대다수의 굴라그 수용소가 수감자들이 수용소와 인근 마을을 이동할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은 미국 자료와 러시아 자료를 토대로 얘기한 것이다.
따라서 한나 아렌트나 리처드 파이프스식 전체주의론 접근은 굴라그와 나치의 절멸수용소를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비교해 보았을 때,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오히려 히틀러의 나치즘은 서구 제국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다. 나치즘의 레벤스라움에 입각한 타국 정복이나 약탈경제체제는 영국ㆍ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경제 시스템과 유사하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는 역으로 미국이나 영국의 타국 및 타인종 지배전략과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다. 미국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어떻게 죽이고 강제추방하고 또 대량학살했는지를 생각하면 어떤 면에선 나치와 유사하다. 또한 영국이 인도인들을 어떻게 지배했는지 생각해 보자. 역사적인 측면에서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히틀러와 나치는 서구 제국주의의 복사품으로 보일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련에는 나치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가진 인종주의적인 어젠다가 없었다. 소련 사회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시점부터 인종주의에 맞서 싸워왔다. 물론 개별 인종 간의 차별이 없다고한다면 빈말이지만, 미국이나 서방 사회에 만연하던 법적 측면에서의 인종차별을 소련이 철폐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스탈린은 그 어떠한 측면에서도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굴라그가 인종에 따라 운영되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미국은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행정명령 제9066호에 따라 일본인만 분류하여 12만 명을 사막에서 강제수용했다. 소련에선 그런 일은 당연히 없었다. 나치 히틀러는 유대인을 포함한 타인종을 인종청소하기 위한 절멸 수용소를 가동시켰다. 소련에는 그런 수용소가 당연히 없었다. 사람들이 나치가 얼마나 경악스러운 제노사이드를 감행했는지 간혹 까먹는데,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만 110만 명이 전쟁 기간 대량 학살당했다. 소련에 이런게 있었냐고?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이런 점들을 비교해볼때, 히틀러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동일시하는 건 여러 오류가 나오게 된다.
물론 스탈린이라고 해서 한계와 과오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잘못된 정보들이 너무 많다.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적어도 히틀러와 같은 인물로 비교하는 서구 제국주의 중심적인 인식을 깨야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소련 굴라그에 대해 얘기했는데, 다음번에도 스탈린의 왜곡된 시각에 대해 반박하는 시리즈 글을 올리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