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탈린 바로 알기-8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생략되는 것

by 김남기

(이 글은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목적하에 연재하게 된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공부한 것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짧게 정리하며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1939년 8월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와 나치 독일의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가 맺은 협정을 알 것이다. 소위 독소 불가침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더 깊이 파고들면, 서구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독소 불가침 조약과 더불어 소련의 폴란드 동부 지역 분할접수와 소련의 핀란드 침공(Soviet Invasion of Finland)에 대해 강력히 비판할 것이다. 독소 불가침 조약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접수에 대해선 이미 5장과 6장에서 다룬 바가 있다. 따라서 오늘은 집단 서방에서 스탈린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재로 이용하는 겨울전쟁(Winter War)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1930년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관된 정책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팽창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소련에서 진행된 스탈린의 공업화 또한 이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한 역사이며, 실제로 소련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탱크와 대포 그리고 항공기 등의 군수물자 생산에 박차를 가했었다. 거기다 7장에서 다룬 바와 같이 소련은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프랑코 파시즘 진영에 맞서기 위해 민주진영을 적극 지원했다. 거기다 소련은 극동에서도 파시즘에 맞서 전쟁을 치렀다. 1938년 하산호 전투와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강력히 격파했으며, 노몬한의 경우 소련 측 추산에 따르면 일본군은 5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스탈린과 보로실로프.

1939년 9월 소련이 폴란드 동부를 접수하고 난 이후, 또 다른 나라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으며 그 나라가 바로 핀란드였다. 여기서 핀란드에 대해 잠시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핀란드는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 이후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내전을 겪은 나라였다. 그러나 여기서 승리한 주체는 볼셰비키 세력이 아닌 우익 세력이었다. 핀란드 내전 시기 핀란드 우익들은 반공 정책 하에 무려 핀란드 전체 인구의 1~2%인 5만 명을 학살했다. 이후 핀란드에는 반공주의 정부가 들어섰고, 핀란드 내전에서 전공을 세운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이 핀란드의 지도자가 됐다. 따라서 핀란드는 소련에게 매우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국가였다.

소련 레닌그라드와 핀란드 헬싱키의 거리: 해당 지도를 통해 양측의 도시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소련 정부는 레닌그라드 방어에 대해 극도로 걱정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리는 레닌그라드는 핀란드와는 불과 32km 거리에 위치해 있는 도시다. 그 당시 핀란드는 나치 독일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반공주의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련은 핀란드로부터 자국을 방어해야 한다 생각했던 것이다. 소련은 처음에 핀란드에게 상호원조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이것을 거부한 주체는 소련이 아닌 핀란드였다. 핀란드가 이를 거부하자 소련은 핀란드 국경선을 이동하여 두 배 정도 규모의 영토를 교환하여 해군기지 설치를 위한 땅을 임대해달라는 역제안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핀란드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는 책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소련이 소련-핀란드 상호 원조 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대표단을 파견해 달라고 핀란드에 요청했던 1939년 10월 5일, 전쟁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대표단은 협정에 대한 요구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소련은 해군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핀란드 만(灣)의 몇몇 섬을 조차하거나 임차하고 싶다는 요구도 내밀었다.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에서 3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소련-핀란드 국경을 북서쪽으로 옮기기를 원했다. 그 보상으로 핀란드에는 극북의 소련령 카렐리야의 영토가 주어졌다.


따라서 실제로 소련은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핀란드에게 일부 영토를 양보할 역제안을 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제안을 핀란드는 철저히 거부했다. 심지어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핀란드는 10월 중순에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대비하며 핀란드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다수 체포하여 구금했다. 결국 스탈린은 핀란드와의 전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판단했고,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는 11월 중후반까지 핀란드를 치기 위한 병력 편성을 마무리했다. 11월 28일 소련은 핀란드와의 불가침 협정을 폐기했으며, 다음 날인 29일에는 단교했다. 그렇게 해서 11월 30일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핀란드를 공격했다.

핀란드의 전설적인 저격수 시모 헤위해: 핀란드의 전쟁영웅으로 소련군 500명을 저격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의 핀란드 침공이 매우 부당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친 것이니 그 점만 보자면 그렇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전쟁의 책임에 있어서 상당 부분 핀란드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소련의 역제안을 거부한 것은 핀란드고 그 전쟁을 유도한 것도 핀란드였다. 미국 역사학자인 스티븐 코트킨(Stephen Kotkin)에 따르면, 겨울전쟁은 충분히 협상을 통해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분명 스탈린은 꾸준히 이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소련의 모든 양보적 제안을 결국 거절한 것이 핀란드니 코트킨의 이러한 주장은 분명 논리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핀란드군.

소련은 이 전쟁에서 100만 명의 병력과 1,500대의 탱크 그리고 3,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투입한 병력에 비해 전쟁 초기 소련군은 핀란드군을 상대로 신속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붉은 군대의 초기 공격은 실패했다. 반스탈린 성향이 강한 러시아의 역사학자 올레크 흘레브뉵은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은 전투 중 사망 및 실종자가 2만 3,000명, 부상자가 4만 4,000명인데 반해, 소련군은 전사자와 부상으로 인한 사망자 그리고 전투로 인한 실종자가 13만 명이고, 부상당하거나 동상에 걸린 군인이 20만 명이 넘었다.”라고 하며 소련의 완전한 졸전이라 평가했다. 즉, 친서방 성향의 인사들이나 반스탈린 성향의 인사들은 이와 같은 증거를 바탕으로 소련의 핀란드 침공이 소련의 실패 혹은 패배라고 주장한다.

세묜 티모셴코: 보로실로프가 사령관에서 물러난 이후 사령관이 되어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공로를 세웠다.

그에 반해,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비록 초기 소련의 공격은 핀란드의 저항으로 실패했지만, 1940년 1월 소련군이 조직을 개편하고 군을 증강한 다음, 세묜 티모셴코(Semyon Timoshenko)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에는 전선 상황이 소련에게 유리해졌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핀란드군이 형성한 만네르하임선을 돌파하고자 했고, 1940년 2월 중순에 시작한 대규모 공세로 만네르하임선을 깨뜨리고 광범위한 전선을 따라 핀란드군을 뒤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1940년 3월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핀란드 방어의 남은 부분을 붕괴시키고 수도 헬싱키로 진격한 다음 그 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핀란드의 평화협상 타진에 반응하여 종전 조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1940년 3월 13일 맺은 조약 조건에 따라 핀란드는 소련의 주요 영토 요구를 들어주게 되었다. 사상자의 경우 몰로토프에 따르면 겨울전쟁에서 소련군 사상자는 사망자가 4만 8,745명, 부상자가 14만 8,863명인 반면 핀란드인 사망자는 6만 명 부상자는 25만 명이었다. 즉, 앞서 언급한 추정치랑 비교해봤을 때, 소련이 압도적으로 패배한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련 붉은 군대 기관총 사수.
겨울전쟁 당시 돌격하는 소련군을 제현한 사진.

겨울전쟁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파시즘 국가와 서구 제국주의 국가가 보인 행동이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이래,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미국,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핀란드를 위해 700대의 비행기, 1,500문의 대포, 그리고 6,000정의 기관총을 핀란드에 보냈다. 프랑스 정부는 핀란드를 돕기 위해 5만 명의 원정군을 모집했으며, 영국은 1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보낼 것이라 공언했었다. 물론 이 병력들은 겨울전쟁이 끝나기 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보낸 소수의 자원병들이 핀란드를 위해 싸웠다. 당시 지원군으로 참전한 인물 중에는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영화배우인 크리스토퍼 리(Christopher Lee)도 있었다. 소수의 나치 독일 군사고문단도 핀란드에 들어갔다.

히틀러를 만난 핀란드의 만네르하임: 1942년 당시 사진이다. 이처럼 핀란드는 나치의 동맹이었다.

무엇보다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소련 침공에 적극 협력했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핀란드는 전적으로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소련을 침공했다. 히틀러가 계획한 바르바로사 작전이 6월 22일이었는데, 핀란드는 그로부터 3일 뒤인 25일에 소련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겨울전쟁에서 잃은 핀란드 영토를 다시 되찾기 위해서였다. 독일의 소련 침공에 핀란드가 동원한 병력만 해도 대략 60만 명이 넘었으며, 1941년 9월 나치 독일은 러시아의 상징적인 도시 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핀란드는 아주 적극적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동참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900일간의 포위전으로 매우 참혹한 전투였는데, 핀란드는 도시 북부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소련의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겨울전쟁 관련 서적.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항상 서구의 인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언급할 때, 소련은 가해자 핀란드는 피해자라는 공식으로만 본다. 마치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핀란드 또한 나치에 협력한 국가였고, 나치에 친화적인 국가였다. 그러니 나치와 동맹을 맺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핀란드 하면 복지 좋은 북유럽 국가로만 생각하지만, 이런 역사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겨울전쟁에 대해서도 지극히 서구적 시각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그런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