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감각했던 시절, 몸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by 글꽃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힘든 일이 있었는데 슬프지 않았고, 슬퍼야 할 것 같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냥 공백만 있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싶거나, 혹은 그게 더 편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정이 없으면 아프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시절 감정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그 시절을 버티는 방법이었고, 몸은 그 모든 것을 다른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감정적 무감각(emotional numbing)은 압도적인 감정 경험에 대한 신경계의 보호 반응이다. 너무 강렬하거나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는 감정적 자극이 들어올 때, 신경계는 그것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것은 의지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동적인 조절 과정인데, 스티븐 포지스의 다미주 이론에서 말하는 등쪽 미주신경(dorsal vagal) 반응과 연결된다. 극도의 위협이나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 앞에서 신경계는 싸우거나 도망치는 대신 얼어붙고 차단하는 반응을 선택한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몸이 멀게 느껴지고, 세상이 유리 너머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이 상태에서 온다.

그런데 차단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베셀 반 데어 콜크(Bessel van der Kolk)가 말하듯, 몸은 점수를 기록한다. 의식적으로 처리되지 못한 감정 경험은 신체에 저장된다. 만성적인 근육 긴장, 설명하기 어려운 통증, 소화 장애, 만성 피로, 면역 기능의 저하 같은 신체 증상들이 처리되지 못한 감정 경험과 연결될 수 있다는 증거들이 심신의학(psychosomatic medicine) 분야에서 꾸준히 축적되어 왔다. 어깨가 항상 긴장되어 있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이 반복되거나, 특정한 상황에서 갑자기 메스꺼움이 오는 것들이 오랫동안 처리되지 못한 감정의 신체적 흔적일 수 있다.

신체화(somatization)라는 개념이 있다. 심리적 고통이 신체 증상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꾀병이나 과민 반응이 아니라 신경계 수준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과정이다. 감정을 처리하는 신경 회로와 신체 기능을 조절하는 자율신경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적 처리가 차단될 때 그 에너지는 신체 조절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 무감각했던 시절 몸이 자주 아팠다거나, 감정이 차단된 상태가 길어질수록 신체 증상이 늘어났다는 경험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각을 되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천천히, 그리고 몸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감정이 차단되어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격렬한 감정을 경험하기보다, 먼저 몸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느낌, 손의 온도. 이런 사소한 신체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감정으로 돌아가는 길의 입구가 되기도 한다.


무감각했던 것을 탓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은 그 시절을 버티기 위해 신경계가 선택한 최선이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 시절이 지나간 지금 비로소 그것을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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