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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우리 삶에 들오기까지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변화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4단계 BK21

동아시아 SAP 융합 인재 양성 사업팀

최휘원 (석사과정, 참여대학원생) 



  탑(塔)은 본래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무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불탑(佛塔)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게 되는데, 우리가 아는 형태의 탑은 목탑(木塔)에서 시작됩니다. 이후 중국은 전탑(塼塔), 백제와 신라는 석탑(石塔)으로 변화합니다. 신라도 잠시 전탑이 만들어지는 시기가 있으며 대표적으로 분황사 모전석탑이 있으나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석탑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고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옵니다.


  그들은 왜 나무에서 돌로 탑을 만들기 시작했을까요. 목탑과 석탑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당대 사람에게 탑은 사리를 봉안하는 ‘무덤’이었을까요. 오늘은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면서 달라졌던 탑의 모습과 그 의미를 알아볼까 합니다. 


  목탑은 통일기인 7세기 전후까지 만들어지다가 8세기가 되면 석탑이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경주지역에서는 이후 석탑이 다량 만들어지면서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상을 잘 보여줍니다. 경주 내에만 대략 100개가 넘는 석탑이 확인되었고, 그중에 절반가량이 경주 남산에 집중되어 있으니 얼마나 많은 석탑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목탑은 말 그대로 나무로 만든 탑이며 금당이나 강당처럼 하나의 공간을 형성합니다. 이들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크기에 따라 그 부재 수가 늘어납니다. 통나무 하나로 목탑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각각의 부재를 끼워 맞춰 하나의 건축물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 크기와 높이에 따라 그 부재 수도 급격히 늘어났을 것입니다. 







  목탑을 만드는 것은 그만한 재력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또 나무는 불에 취약하다는 점에서 사리를 봉안하는 데에 약점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석탑은 그에 반해 불에 약하지도 않으며, 하나의 돌로 여러 나무를 대신할 수 있었죠. 


  목탑에서 처음 석탑으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석탑에서도 목탑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중 기단, 계단,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기단보다 넓은 갑석, 감실형과 문비형 탑신부 등이 그 흔적입니다. 2중 기단, 기단보다 넓은 갑석은 나무가 물에 닿아 상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들입니다. 돌도 빗물에 깎인다지만, 나무처럼 물에 젖어 주저앉을 일은 없었을 것이니 굳이 따지자면 석탑에는 어울리지 않은 형태입니다. 감실형과 문비형은 문을 장치해 내부에 공간을 만든 형태로, 불상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공간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본래 목탑에 사용된 방식이나 석탑에서도 그 사례가 종종 확인됩니다. 


좌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감실형 탑신 / 우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 문비형 탑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우주와 탱주입니다. 우주(隅柱)는 모서리에 세워진 기둥, 탱주(隅柱)는 우주 사이에 세워진 기둥을 뜻합니다. 우주와 탱주는 목조건물에서 나무 기둥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데, 석탑에도 이들이 확인됩니다. 다시 말해 나무 기둥을 석탑에 새겨 넣은 것이죠. 초기 석탑에는 기단 하층과 상층 기단 모두에서 확인되며 탱주의 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감소하는 현상을 보입니다. 가장 목탑적인 요소가 지속되어 오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탑의 문화는 단절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목탑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석탑이었을 수 있고, 당대 사람들에게 석탑이 조금 더 선호하는 대상이었던 것이죠.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정측면


  초기에는 무겁고 운반하기 어려운 석재로 황룡사 9층 목탑과 같은 높은 탑을 만들지는 못하였습니다. 주로 3층이나 5층으로 안정된 층수 내에서 제작할 수 있는 석재의 크기를 최대한으로 키우고, 찰주로 높이를 보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후에는 목탑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를 석탑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황룡사지 목탑지 초석 노출 상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탑은 나무 기둥이 물에 닿지 않게 먼저 돌을 다듬어 놓아야 했고, 돌과 기둥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기 위해 땅을 단단히 다져야 했습니다. 목탑의 전체 크기가 커짐에 따라 필요로 되는 흙과 석재가 더 늘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석탑은 기단의 결구 방식을 더 단단히 하거나 하나의 석재를 통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기초부가 축소하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목탑보다 석탑을 축조하기에 조금 더 용이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목탑지가 확인된 유적 중 익산의 미륵사지, 왕궁리사지, 제석사지와 경주의 사천왕사지, 황룡사지는 왕실에서 발원한 사찰입니다. 주로 왕실과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외세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호국(護國)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목탑에 사용된 많은 노동력과 비용은 왕실의 위용을 보여주는 데 충분했을 것이며 이들은 그 어느 사찰보다도 목탑의 규모를 키워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대한 목탑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지 않았을까요?


  그 이후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목탑을 만들던 문화가 석탑으로 넘어오게 되고, 목탑보다는 용이성이나 접근성이 높은 석탑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고, 사람의 부류도 다양해지게 된 것이죠. 석탑의 유행은 왕실 중심으로 전개된 사찰문화를 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석탑은 사찰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경주 남산에서 확인되는 수많은 석탑들이 있습니다. 사찰 건물지가 함께 확인되지 않는 석탑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낮은 평지에서만 만들어지는 목탑과 다르게 다양한 지형적 조건을 극복하면서 조형되기도 합니다. 자연석을 그대로 기단 삼아 석탑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과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있죠.


  사찰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게 되면서 표현의 자유가 생긴 것입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석탑은 점차 기단의 종류, 탑신부의 형태, 탑의 크기 등에서 정형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석탑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방증합니다. 


좌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김동하 2022) / 우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기서 우리는 탑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찰에서 벗어나면서 다양해졌던 석탑이 당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을까요. 아마 석탑은 불교 건축물로써 축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조형되기 시작하면서 탑에 내포된 의미는 변화했을 것입니다. 경외의 대상이었던 목탑과도 그 의미가 달랐겠죠.


  하나의 문화가 유행의 시기를 거치고 나면 본연의 의미를 잃거나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노스○○○ 패딩’이 한때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는 패딩의 의미보다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어떤 집단 내 권력을 상징하는 의미로 변화한 것과 같습니다. 더 비쌀수록 더 큰 권력을 갖는 것처럼 보였죠.


  무덤으로 시작된 탑은 사리를 봉안하게 되면서 탑은 곧 부처라는 인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석탑이 크게 유행하게 되고, 종교적 테두리에서 벗어나 다양화를 이루면서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당대 사람들의 일상에 들어와 하나의 문화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족의 건강, 자식의 번영, 사업의 안정 등등 각각의 바람을 위해 공양을 올리는 것처럼 당대 사람들도 각각의 이유로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석탑을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부처로 여겨지기보다는 나의 바람을 형상화한 대상물이었던 것이죠.


  경주에 만들어진 석탑의 수와 그 밀집도, 조형된 환경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면 당대 사람들이 석탑을 부처로 생각하고 만든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나 석탑을 볼 수 있고,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석탑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다시 말해, 탑을 종교적 산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찰문화 속에서도 ‘탑 문화’ 그 자체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 참고문헌 

김춘호, 2010, 「백제 목탑에 관한 일고찰 – 그 사례와 특징 -」, 『韓國思想과 文化』 55 

김동하, 2022, 「경주 남산 불교유적의 형성과 성격」, 『美術史學硏究』 314, 한국미술사학회

박경식, 2012, 「석탑에서 볼 수 있는 목조건축 양식」, 문화재청

정해두, 2012, 『통일신라기 석탑기단부 조영에 관한 연구』, 경일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채무기, 2006, 『7세기 석탑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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