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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의 성

나상현

이란?


  ‘(城)’이라고 말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벽돌 모양의 돌로 쌓은 서양의 웅장한 성들을 떠올릴 것이다. 아니면, 우리나라의 UNESCO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 팔달문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꽤 있으리라 생각한다.


  성은 옛날부터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식량, 시설을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군사적인 의미로 좁혀서 보자면, 외적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마련한 방어시설로, 소수의 인원이 많은 적의 직접적인 공격을 지연시키면서 대항해 살아남기에 가장 확실한 수단 중 하나다. 그 때문에 전쟁이 빈번했던 옛날에는 성 내·외부에 더욱 다양한 기능을 가진 시설들을 배치해 생활·방어의 기능을 극대화시키고, 이들의 확장으로 인해 두 번째 성벽인 ‘곽’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흔히 고고학에서의 전문용어로 ‘성’을 부를 때 ‘성곽’이라고 하는 이유다. 이처럼 고고학에서 성은 몇 개의 성벽과 그 안에 만들어 놓은 시설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은 요르단강 서쪽에 있는 예리코(Jericho)에 있다. 예리코성(Walls of Jericho)이 그것이며, 기원전 8000년경에 축조되었다. 한반도에는 그보다는 늦은 울산의 울주 검단리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에서 토성의 원시적인 형태인 토루(土壘, 흙으로 만든 벽체)와 환호가 최초의 집락방어시설로 확인된다. 또한 부여 송국리 마을 유적의 외곽에서도 목책(木柵, 나뭇가지들을 촘촘하게 엮어서 땅에 꽂아 벽처럼 만든 것)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한반도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곽’이 등장하기 전에는 이처럼 단순한 방어시설이 성을 대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는 삼국시대부터 성곽이 확인되는데,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성들이 지어져 있다. 다만 평지나 구릉에 지어진 성들은 대부분 붕괴되거나 사라져 흔적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상당수가 산에 남아 있다. 실제로 필자가 지표조사를 다니다 보면, 정말 수많은 산에 성을 지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성은 그 입지에 따라 산성, 평지성, 해안성, 강안성, 구릉성 등으로 나뉘지만, 고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성곽’이라는 단어보다 ‘산성’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거제도의 성곽

  우리나라의 성은 갑오개혁 당시 근대적인 군 제도로의 개편에 따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마지막 성은 어딜까?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 성은 거제도에 있다.









옥산(금)성

    옥산성기록에서 전하는 한반도의 마지막 성이다. 거제면 동쪽 계룡산 밑의 수정        봉(    水晶峰) 정상에 있으며 규모는 둘레 778.5m, 최고 높이 4.7m, 폭 3m이다. 수정봉성 또는 옥산금성이라고도 한다. 사실 옥산성이 지어진 것은 조선시대 이전이지만, 성을 수리한 것은 조선시대인 1873년 10월 15일로, 옥산성의 비석이 말해주고 있다.


  성문 밖에는 ‘옥산금성(玉山金城)’이라고 새겨진 큰 암벽이 있고, 성안 동쪽에는 앞서 말한 축성비(성을 지은 내력을 말해주는 비)가 서 있다. 이 비에 따르면, 조선 고종 때인 1875년 계유년 3월 15일 거제부사 송희승(宋熙昇)이 읍성을 만들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하지만 거제도에는 이미 사등성, 고현성, 오량성 등의 성이 축조되어 백성들의 어려움이 많고, 이미 읍터를 3회나 옮겨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이에 송희승은 읍성 대신 산성을 축조하기로 했다. 군민들에게 돈을 거두고 강제로 부역하게 하여 8개월 만에 옥산성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조정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산성을 축조한 일이 알려지자 송희승은 파직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옥산성은, 지름 40∼80㎝의 긴 사각형 자연석을 끝을 가지런히 하여 산능선의 굴곡에 맞추어 타원형으로 쌓아올리고 성 안에 누각, 무기고 호(壕), 연못 등을 만들었다. 남쪽과 서쪽의 성문은 ‘ㄱ’자형으로 만들었고 돌계단을 두어 성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동·서·남·북 사방에 4문을 두었고 성 가운데는 우물이 있으며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그만큼 많은 성들이 있는데, 옥산성 이외에도 둔덕기성, 다대산성, 가배량성, 오량성, 옥산(금)성, 외도성, 사등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사등성거제도에 지어진 최초의 읍성이기에 주목된다. 우리나라에서 순수한 읍성의 개념이 시작된 것은 고려시대 후기로, 초기에는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일갑 2007: 2). 단순히 읍을 둘라싸며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활용하기 위한 성곽의 성격이 강했다는 뜻이다. 거재도에는 옛날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다.       




사등성


  사등성은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 2300번지에 위치한다. 평지의 들판에 돌로 쌓은 삼국시대 성으로, 둘레 986m, 높이 6.1m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기록이 등장한다. 고려 원종 12년(1271) 왜적의 침입으로 거제도민이 진주·거창 방면으로 피난했을 때, 수월리에서 목책(나무를 세운 후 엮어 만든 울타리)을 치고 생활하다가, 세종 4년(1422)에 사등리로 관아를 옮겨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거주민이 늘어나면서 성이 좁고 물이 부족하게 되었다. 단종 1년(1453) 고현성으로 읍치를 이동하기 전까지 5년간 거제의 읍성으로 사용되었다.


  성벽 바깥으로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침입자를 막기위한 긴 물도랑)가 둘러져 있다. 문지는 3개소로 모두 옹성(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문 앞에 설치되는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치성(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곽 일부를 돌출시킨 성벽)은 4개소가 확인된다. 남아 있는 성벽의 상태가 양호하여 조선 시대의 성곽 구조와 건축술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 이일갑, 2007, 「慶南地域 沿海邑城에 대한 硏究」,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이 글은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전공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는 대중고고학연구회에서 발행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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