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아 여류 젊은 평론가님으로부터
은월 김혜숙 시인의 『아득하고 멀도록』에 관하여
은월 김혜숙 시인의 제3 시집이 제1 시집 『어쩌자고 꽃』(2018) 제2 시집 『 끝내 붉음에 젖다』(2022) 이후 올해 6월에 인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김혜숙 시인은 경기도 양평에 농원을 마련해 농사를 짓고 있으며, 겨울철엔 사진 촬영 및 편집일을 하느라 바쁘다. 제3 시집 『아득하고 멀도록』은 김혜숙 시인이 양평이라는 공간을 모티브로 사랑, 삶, 자연의 심미안을 펼쳐나간다. 이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4부는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이별에 관한 안타까움이 부각된다.
조명제 문학평론가는 제3 시집 『아득하고 멀도록』시집에 대해 ‘직관적 특성을 드러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미묘한 관계의 기율을 안아들인’시집으로 평가한다.
여전히 지지 않는 꽃처럼 아름다운 은월 김혜숙 시인의 제3 시집이 궁금하다.
잠시 동면에 들어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잠들다 또다시
피는 날이 있다는 것만도
숨이 쉬어지는 일
지면을 들썩이는 때가
멀지 않으니 좀더 인내하는 것
살아 있음에 할 수 있는 것
존재감 없어도 존재를 꿈꾸는 일도
공기층에 비집고 있는 그 무엇의 힘
그것 때문에 없는 존재감도 숨 쉰다
곧 꽃 피는 날이 온다
- 「지나고 보면 다 꽃피는 때였다」전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처럼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이 지나면 진다. 꽃이 만개하면 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가장 절정기를 맞이한 이후 생을 정리한다. 어찌 보면 자연의 순환 원리는 우리의 인생과도 참으로 많이 닮았다.
만개한 꽃의 생명은 짧은 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오기 위해서는 자연의 재해 등 온갖 고통을 이겨내어야 한다. 시인의 “지면을 들썩이는 때가 멀지 않으니 좀더 인내하는 것 살아 있음에 할 수 있는 것”의 시구를 보니 자신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언젠가 지금보다 발전할 수 있는‘꽃 피는 날’이 올 거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줄 만큼 주시고 받을 만큼만 주신다
작년 고추 수확은 풍작이라
고춧가루로 육십 근을 만들었다
작년에 많이 줬으니 올해는 적게 먹으라 한다
고추 수확하면서 세상 공평함을 또 깨달음 받는다
탄저병에 잦은 비로 물러터진 고추의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그만큼만
더도 말고 그만큼을 배운다
자연은 언제나 공평하다
-「고추를 따면서」전문
우리는 인생을 흔히 농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식을 잘 양육하면 “자식 농사 참으로 잘 지었다.”라고 표현한다. 농사는 씨앗을 뿌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밭의 크기와 상태, 기후 조건, 물과 햇볕의 양, 영양 상태에 따라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다. 또한 그 열매가 맺히더라도 방치하면 안 되고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관심을 가져야 튼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자연재해나 ‘탄저병’처럼 3의 요인에 의해 농사를 망칠 수 있으니 그만큼 농사도 인생처럼 맘대로 되지 않는다. 은월 김혜숙 시인은 단순히 농사만 짓는 시인이 아니라, 농사를 통해 인생을 깨닫는다. 시편「고추를 따면서」은 세상에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자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김혜숙 시인의 겸손함이 잘 묻어난 시이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늘 쥐고 담는 손으로
만족하기도 울분하기도 한다
결국 손을 펴고 갈 일을 잊고서
피가 가장 뜨거울 때
꽃을 피웠고 또 비루해진
모든 것이 더 나아질 수 없으면
어제보다 오늘 잘하면 될 것이며
우린 사랑하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듯
버릴 용기도 필요하다 했다
지상에 스며들고 난 후
세상에 진한 흙냄새 하나
남기고 가는 일이면
족하지 않겠나 그것이면 된다
-「살다 보니」전문
“무소유란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닌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청렴하게 사는 건 힘든 일이다. 생을 다하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감을 다 아는 사실인데도 버리는 게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김혜숙 시인의 말처럼 살면서 우리에게‘버릴 용기’는 꼭 필요하다.
부챗살 가지에 삼각 조각
노란색 종이를 붙이고
손잡이 끝에 젤 큰 종이 붙이며
언제 왔느냐 하는, 요양원 유리문으로
비치는 어머니의 공작 시간
수십 번의 계절 넘나들며 폈다 오므린
시간 때문에 두 다리에 30년 넘은
가짜 연골 넣고 느림보 걸음 걸어온 세월
올봄 어머니 저세상 가시고
책갈피에 넣어둔 은행잎을 덕지덕지 붙이다 만
부챗살 가지 사이사이에서 와르르
은행알 떨어지는 소리가 천 년만큼 들렸다
-「노란 나무 부채」전문
제3 시집 『아득하고 멀도록』4부에서는 은월 김혜숙 시인의 타계하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많이 묻어나 있다. 필자의 시부모님도 요양원에 계시다 돌아가셔서 김혜숙 시인의 아픔이 마음에 와닿았다. 시편 「노란 나무 부채」는 ‘은행알 떨어지는 소리가 천년만큼 들렸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머님에 대한 사랑, 그리움을 부르짖는 시인의 절절한 외침으로 들린다.
김혜숙 시인의 제3 시집은 살면서 누구든지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삶의 이야기라 공감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특히 자연과 공생 공존하는 시인의 삶에서 시인의 삶의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은월 김혜숙 시인의 제3 시집 『아득하고 멀도록』이 독자의 사랑을 많이 받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