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실존적 심리

by 신아르케

신의 존재를 내면에서 거부하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유무를 넘어선 보다 깊은 실존적 심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는 곧 신을 단순히 외적 개념이나 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서 인식할 수 있는가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모든 인간이, 각기 다른 언어로 설명할지라도, 내면 깊숙이 들려오는 조용한 소리, 즉 양심의 속삭임을 경험한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 내면의 음성은 때로는 죄를 자각하게 하고, 때로는 선한 길로 이끌며, 때로는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이 것을 ‘신의 음성’이라 부른다.

이성, 양심, 선에 대한 갈망은 인간 존재에 깊이 새겨진 코드와 같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방향의 욕망 -자기 합리화, 정욕, 이기성, 무감각 - 도 공존하며, 인간은 그 갈림길에서 매 순간 선택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내면의 음성은 판단과 선택의 중심에서 점점 부담이 된다. 자신이 이미 따르고 있는 방식이 그 음성에 반한다는 것을 느낄수록, 인간은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고, 급기야 그 목소리의 근원이 되는 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실존적 기제는 성경 요한복음 3장 19절의 말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를 통해 가장 정확히 드러난다. 인간은 스스로의 어둠을 감추기 위해, 빛의 존재를 외면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신의 존재가 실제로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아야 하는 실존적 책임이 따르기에, 그 존재를 외면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이가 들고 자신만의 철학과 세계관이 확고해질수록,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것은 곧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뿌리를 부정하고, 낯선 빛을 향해 스스로를 전복시켜야 하는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은 단지 하나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결단과 함께 온다.

물론, 세상에는 신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면서도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나는 이런 이들을 무의식적 신앙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은 스스로 신을 부정하면서도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며, 그 삶 자체가 신의 뜻을 따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한 소년이 어떤 소녀를 사랑하면서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 소녀의 안위를 누구보다 챙기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나 반대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윤리적 기준마저 무너진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자신이 만든 내면의 공허와 고통을 견디지 못해 다양한 중독, 타인에 대한 원망, 자기 합리화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신앙 유무와는 별개로, 모든 인간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지만, 내면의 음성 자체를 차단한 채 살아가려는 삶은 결국 어둠을 빛보다 더 사랑하는 자의 삶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가 항상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수많은 순간에 그 음성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과 반복된 회개의 과정이 나로 하여금 더 겸손해지고, 더 정직해지며, 더 사람다워지도록 만든다.

중요한 것은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은 자기 내면의 지옥 혹은 천국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간다. 구원이란, 내면의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실존적 결단의 총체이며, 그 누구도 타인의 구원을 대신할 수 없다. 어두운 삶의 방식에 중독되어 빛이 괴로운 이들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살아가며, 그 감옥의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다.

결국,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이란 단지 ‘신이 있다’는 진술을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앞에서 자기 삶을 통째로 내어놓고 새롭게 살아가려는 용기를 의미한다. 그 결단은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해방과 구원의 시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