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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

by 신아르케

우리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별할 때 기준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사물이 제자리에 있는가이다.
신발이 신발장에 있으면 질서가 있지만, 침대 위에 놓여 있다면 어딘가 어색하고 잘못된 느낌을 준다.
물론 사물은 생명이 없으니 죄를 물을 수는 없지만, 인간은 사물조차 의인화하며
그 부조화를 ‘잘못됨’으로 느낀다.

신발이 발에 신겨져 착용자의 발을 편안하게 해줄 때,
그것은 제 역할을 다하는 선한 상태다.
그러나 신발이 손에 껴 있다면, 그 기능을 잃은 것이다.
모든 사물은 그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망치, 톱, 연필처럼 각기 다른 도구가 제 쓰임에 맞게 사용될 때,
우리는 그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목적은 무엇일까?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고 말했다.
인간은 단순히 유용성으로 평가될 수 없는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성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각자는 자신이 가장 자연스럽게 빛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 자리에 있을 때, 자신도 평안하고 세상도 함께 이로워진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
강인한 사람의 힘이 누군가를 돕는 현장에서 쓰일 때 그것은 선이 되지만,
지배와 폭력의 수단이 되면 악으로 변한다.
심미적 감수성이 뛰어난 이는 예술과 교육의 자리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고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수성이 탐욕과 비교의 욕망에 묶이면
그 재능은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불행하게 만든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야 할 곳’이란,
자신의 기질과 능력이 가장 자연스럽게 작동하며
자신도 평온하고 타인에게도 유익을 주는 자리다.
그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욕심이나 허영으로 맞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면
스스로 괴로워지고 주변까지 어지럽힌다.

물론 인생은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해야 할 일, 가야 할 자리, 맡은 역할이 있다.
아버지이자 배우자, 교사이자 시민으로서 우리는 관계의 망 속에 얽혀 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조금씩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노력은 가능하다.
그 자리는 나이와 경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젊을 때는 앞장서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뒤에서 믿고 맡길 줄 알아야 한다.
그 변화야말로 성숙의 표지다.

나는 아직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신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신의 의도와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방향을 향해 걷고자 하는 의지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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