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자기 최면을 연습하고 있다.
타인에게 최면을 거는 일은 위험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는 것은 오히려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실존의 실험이 될 수 있다. 나는 지금 기도와 명상, 그리고 자기 최면이 가진 장점들을 모아 나만의 영적 루틴을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그 근저에는 한 가지 공통된 지향이 있다. 의식의 표면을 잠시 내려놓고, 더 깊은 내면과 조우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자기 최면의 핵심은 무의식에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깨어 있을 때 대부분 의식의 언어로 생각하고 판단하지만, 무의식은 더 단순하며 더 즉각적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최면의 첫 단계는 몸과 마음을 최대한 이완하는 일이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과정은 명상과 다르지 않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일은 영적인 기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몸이 풀리고 마음이 잔잔해지면, 의식의 문턱이 낮아지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무의식의 방에 들어갈 문이 열린다.
두 번째 단계는 ‘의식(儀式)’이다. 거창한 형식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맞는 간단한 관문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이는 한 점을 응시하며 집중하고, 또 어떤 이는 숫자를 거꾸로 세며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이미지를 그린다. 나는 때때로 따뜻한 물속에 떠 있는 장면을 상상한다.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조용하고 보호받는 공간. 무의식은 언어보다 이미지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그림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트랜스 상태가 열린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원리가 있다.
부정을 사용하지 않는 것, 문장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형으로 말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하지 마라’라는 말을 ‘그 장면을 떠올려라’로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부정문은 오히려 부정 대상의 이미지를 강화시키곤 한다. 또한 무의식은 길고 복잡한 문장보다 짧고 단순한 언어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의식에게 미래는 없다. 오직 ‘지금’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차분하다.”
“나는 사랑받는 존재다.”
“나는 유능하다.”
“나는 지금 만족스럽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바라는 상태를 긍정문으로, 현재형으로, 이미지와 함께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암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건네는 언어’를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이다.
최면을 마무리할 때는 바로 의식으로 튀어 오르지 않는다. 무의식과의 거리 차 때문에 내면이 당혹스러울 수 있어서다. 그래서 나는 깊이 내려온 그 길을 역순으로 걸어 올라온다. 다시 숫자를 세면서, 천천히 현실로 돌아오는 신호를 준다. 의식이 조용히 깨어나면 그제야 눈을 뜬다.
나는 이 훈련을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그리고 잠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반복하고 있다. 몸이 깨어나기 전, 몸이 잠들기 직전. 의식의 경계가 얇아지는 그 틈이 무의식과 가장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도나 명상이나 자기 최면이 서로 아주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슷하게 겹쳐 있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내면의 진실에 귀 기울이게 하고, 명상은 의식의 소음을 걷어내어 존재의 중심에 머물게 한다. 자기 최면은 그 사이에서 무의식에 말을 건다. 결국 세 가지 모두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가려는 하나의 길이다.
나는 지금도 이 세 가지를 섞고 비교하고 실험해 보고 있다. 어떤 것은 나에게 맞고, 어떤 것은 덜 맞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 최면이 내 삶에 실질적인 유익을 준다는 점이다.
불안이 가라앉고, 생각의 방향이 안정되고, 내면의 깊은 층에 자리한 상처들이 서서히 언어를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를 매일 새롭게 말해줄 수 있게 된다.
자기 최면은 타인의 힘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언어로 나를 다시 빚어가는 과정이다.
내 삶을 내가 조각하는 작은 실천이며, 내 영혼의 깊이를 조금씩 넓혀가는 조용한 작업이다.
나는 오늘도 그 길을 걷는다.
기도와 명상과 자기 최면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내가 되고 싶은 존재를 향해, 내 안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나에게 말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