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존재 방식에 대하여

by 신아르케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대상을 보면 마음이 열리고, 추한 것을 보면 본능적 거부감을 느낀다.
이 감각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는 매우 깊은 층위에 뿌리내려 있다.
특히 시각이 발달한 인간에게 외모는 첫인상을 결정하는 가장 즉각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얼굴에는 호감을 느끼고
그렇지 못한 얼굴에는 자연스레 거리를 두곤 한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DNA 깊숙이 새겨진 오래된 본능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외모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강렬한 ‘아름다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성격과 존재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갈 자유가 있다.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 타인에게 다가가는 태도, 말투, 표정 등..
각자의 세계를 반영하는 그 방식에는 정답도, 강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
어떤 존재 방식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고 사랑받지만,
어떤 존재 방식은 타인에게 거부감과 불쾌를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외모처럼 성격 또한 일정 부분은 타고난 면이 있다.
그러나 외모와 달리, 성격과 존재 방식은 후천적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더욱 책임이 따른다.
자신의 존재 방식이 타인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지,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다움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는 가능한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한다.
내 기준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배경과 세계에서 비롯된 방식 그대로를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그의 말투나 태도, 존재감 자체가 내게 아름답게 느껴져 자연스레 마음이 열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역시 자신의 자유를 행사할 뿐이지만
그 자유의 방식이 나에게 불편과 불쾌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때 나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법과 최소한의 도덕을 어기지 않는 한, 나는 그의 존재 방식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 역시 자기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불편함을 나 스스로 억지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의 방식이 내게 주는 감정은 분명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듯,
성격과 존재 방식이 아름다운 사람도 있고,
반대로 타인에게 거부감을 주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그저 인간이 서로에게 반응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설명할 뿐이다.

예를 들어, 특정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존재 방식이 있다.
조폭 문화처럼 위협적 태도, 문신, 공격적 말투가 일종의 생존 전략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세계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이 일반적 사회에서 호감을 얻기는 어렵다.
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존재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세계에서의 논리대로 살아가지만,
타인에게 사랑과 호감을 “강요할 수는 없다”.

결국, 존재 방식이 타인에게 주는 인상은
그 사람의 선택과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그 결과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비호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부터 거리감을 경험하거나,
관계가 끊어지는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내뿜는 방식이 사람들을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 사람을 억지로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미워할 이유도 없다.
그저 필요한 거리만 유지하며, 같은 공간에서 인내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태도는
타인의 존재 방식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내 감정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찾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얼굴의 형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품격에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