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 대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보다 동물이 본능에 더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든, 혹은 진화되었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동물은 자기 본성을 거스르지 않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안정된 삶을 산다는 점이다. 물론 표현은 각자의 믿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본성에 맞게 산다’는 감각 그 자체다.
동물의 세계를 살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생태학적으로 볼 때, 태어난 직후 비교적 빨리 독립할 수 있는 종일수록 본능적 행동의 비중이 크고, 반대로 부모의 보호와 학습이 오랜 시간 필요한 종일수록 환경과 경험을 통해 생존 기술을 배운다. 병아리는 태어나자마자 걷고 모이를 쪼지만, 까마귀처럼 지능이 높은 새는 오랜 양육 기간을 거친다. 인간은 어떤가. 혼자 먹고 살아가며 완전히 독립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얼마나 ‘학습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사회가 성년을 법적으로 19세로 정해 놓았다는 사실 또한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본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자는 본능적으로 용맹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고, 사슴은 경계심이 강하고 조심스러운 성향을 지닌다. 말은 달리기에 적합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 말을 평생 좁은 우리 안에 가두어 둔다면, 그것은 그 말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폭력일 것이다.
인간 역시 하나의 종으로서 보편적 공통점을 지니는 동시에, 개체마다 분명히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떤 이는 다혈질이고 외향적이며 에너지가 넘친다. 어떤 이는 차분하고 조용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회복한다. 표현이 다소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만큼 타고난 성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를 하나의 기준에 맞추려는 태도는 지혜롭지 못하다.
이런 맥락에서 동양 철학이나 사주, 운명, 관상과 같은 전통적 사유가 오늘날 유사 과학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과학적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마다 타고난 경향과 흐름이 다르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직관적으로 감지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어 해왔다.
사자는 사자다울 때 가장 행복하고, 말은 말다울 때 가장 안정된다. 이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문제는 그 본성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느냐다. 타고난 기질이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본성을 조절하고 방향을 선택할 책임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성은 운명이 아니라 재료이며, 삶은 그 재료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다.
예컨대 사자 같은 경쟁심과 에너지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 힘을 파괴가 아닌 창조의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 운동선수가 되어 자신의 열정과 신체적 에너지를 극대화하고,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본성은 억압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형태로 승화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타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확히 아는 일이다. 진정한 자기 이해 위에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삶의 자리를 찾을 때, 삶은 불필요한 저항과 고통 없이 흘러간다. 그 상태는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고, 그래서 행복하다.
우리는 그것을 ‘타고난 운명’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이란, 이미 주어진 기질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발현해 나가는 긴 여정일지도 모른다. 생긴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방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정직해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정직함 위에서 책임과 윤리가 더해질 때, 인간의 삶은 비로소 자연과 사회를 함께 이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