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일 뿐임을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 다짐은 겸손한 척하기 위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경계에 가깝다. 신앙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통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많이 접할수록, 인간은 역설적으로 더 쉽게 교만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신앙생활은 윤리와 도덕에 대한 감각을 예리하게 만든다. 문제는 그 예리함이 언제든 자신과 타인을 향한 비판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 역시 그런 위험 앞에 서 있음을 자주 느낀다. 기준은 점점 높아지고, 그 기준은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비현실적으로 엄격해진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사랑 없는 율법주의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성경 속 바리새인들처럼, 의로운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구원받으려는 영적 교만에 빠질 가능성이 늘 열려 있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나의 세속적인 모습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나는 성숙한 신앙인 이전에, 욕망과 허영, 불완전함을 지닌 평범한 인간이며 죄인이라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반복해서 각인시킨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낮추는 척하는 태도 역시 또 다른 형태의 교만일 수 있기에, 나는 완벽한 신앙인의 이미지를 연출하려 애쓰지 않는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허영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드러날 때도 그것을 과도하게 억누르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드러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다시 방향을 조정할 뿐이다.
나는 때로 타인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보기도 한다. 그 경험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내가 얼마나 쉽게 자기 의에 기울 수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흔들리고 실수하는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은 나를 현실로 다시 데려온다. 그리고 이 인식은 자연스럽게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바꾸어 놓는다.
이러한 사고의 훈련이 내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유익은, 나를 조금 더 사랑과 이해, 용서와 관용의 사람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완벽한 척을 내려놓을수록, 타인의 불완전함 역시 현실적으로 껴안을 여지가 생긴다.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때, 타인에게도 같은 너그러움을 건넬 수 있게 된다.
신앙의 본질 역시 그 지점에서 다시 선명해진다. 나의 의를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에 시선을 두게 된다. 구원은 나의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며, 감사의 대상이지 증명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붙들게 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더 바람직하고 겸손한 구원관에 가깝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이 단순한 인식이 기독교인이 끝내 놓치지 말아야 할 신앙적 감수성이다. 신앙의 깊이는 자신을 얼마나 높이 세우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은혜에 기대어 서 있는지를 아는 데서 드러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은혜가 없으면 설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그리고 바로 그 자리가, 신앙이 다시 살아나는 자리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