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다

by 신아르케

우리는 종종 잊는다. 모두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 사람의 현재 모습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경험과 환경, 기질과 성격, 지성과 감정의 한계 안에서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다. 지금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그가 감당할 수 있었던 최선의 존재 방식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판단한다. 나의 기준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삶의 방식이 틀렸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내 이성이 닿지 않는 영역이 곧 잘못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해의 한계는 언제나 판단의 정당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유난히 불친절하고, 경계심이 강하며, 공격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를 예의 없다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태도는 타인에게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선택한 삶의 전략일 수도 있다. 먼저 마음을 닫고, 먼저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연약한 내면을 보호해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지라도, 생존을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방식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외모와 꾸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명품에 집착하고, 성형에 중독된 듯 보이는 모습은 흔히 허영으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깊은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 외적인 장치 없이는 사람들 앞에 설 수 없다는 불안, 무시당하고 배제될 것이라는 공포가 그를 몰아세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에 붙잡힌 상태에 가깝다.

어떤 사람은 아예 관계의 장에서 물러난다. 사람들과의 연결을 끊고 집 안에 머물며 사회적 접촉을 극단적으로 회피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현상은 흔히 히키코모리(hikikomori)라고 불린다. 히키코모리는 특정 개인의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을 의미하는 진단명이 아니라, 장기간의 사회적 고립 상태를 가리키는 현상에 가깝다.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받거나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어 세상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온 결과일 수 있다. 그 침묵과 고립은 선택이라기보다 후퇴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밤거리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마주할 때도 우리는 불쾌함을 먼저 느낀다.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풀어낼 다른 통로가 없는 절박한 상태일 수도 있다. 물론 이해는 곧 허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계와 규칙은 분명히 필요하다. 다만 이유를 상상할 수 있을 때, 분노는 조금 누그러지고 판단은 신중해진다.

모든 사람에게는 특별히 취약한 지점이 있다. 어떤 말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고, 특정 비판 앞에서 감정이 과도하게 요동치는 이유는 그 지점이 과거의 상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이제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옮겨보려 한다. 내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저 사람도 지금 자기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구나”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볼 때, 분노는 연민으로, 경멸은 이해로 조금씩 변한다. 그리고 이 인식은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진리가 아니다. 나 역시 나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삶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절규가 있다. 그것을 모두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함부로 재단하지는 않을 수 있다. 판단 대신 연민의 시선을 선택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따뜻한 태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