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얼마나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얼굴의 미묘한 표정, 말끝의 떨림, 손짓의 방향을 통해 상대의 의도를 짐작한다. 화가 난 얼굴을 보고도 그가 행복하다고 믿는 것은 비합리적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생존을 위해 발달해 온 감각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분노를 빠르게 감지하는 능력은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능력이 유용하다고 해서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예측’을 ‘확정’으로 바꾸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해.” “저 말에는 분명 다른 의도가 있어.” 이러한 판단은 대부분 짐작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짐작은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과 상처, 이미 형성된 편견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타인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나의 렌즈를 통해 왜곡된 이미지를 본다.
강인한 인상을 가진 사람을 보며 우리는 쉽게 거칠고 위압적인 성격을 떠올린다. 그러나 외형과 내면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큰 체구를 가졌지만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고, 또 누군가는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도 단단한 의지를 품고 있다. 우리는 종종 상대를 이해하기도 전에 규정해 버린다. 그것이 편견이다.
삶은 빠르게 흘러가고, 우리는 매 순간 상대에게 그의 현재 감정과 생각을 확인할 수 없다. 더구나 인간의 마음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감정은 흐르고, 생각은 바뀐다. 오늘의 분노가 내일의 후회가 될 수 있고, 지금의 확신이 다음 계절에는 수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말 한마디를 그 사람의 전부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확인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성급히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생명이 오가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추측은 잠시 보류해도 된다.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는 소극적 무관심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신의 절제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말하지 않는 용기다.
이 태도는 우리를 가볍게 만든다. 쓸데없는 추론으로 감정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하고, 타인을 덜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무엇보다 관계 속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줄인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멀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붙들고 싶은 문장은 이것이다.
타인을 평가할 때,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라.
그 한 걸음의 절제가, 우리를 더 합리적이고 더 유연한 인간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