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원수를 사랑하는 일

by 신아르케

나는 감사한 것만 기억하며 살고 싶다.
오늘 주어진 하루를 경이로움과 감사로 채우며, 가능한 한 밝은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원하지 않아도 내 마음 밭에 가라지 씨앗을 뿌리는 자아가 있다. 나는 그것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 씨앗은 이미 뿌려져 있고, 생각은 자라기 시작한다.

특히 하루가 저물 무렵, 몸과 정신이 함께 지칠 때 그 자아는 더 활발해진다. 육체의 피곤함이 마음의 불안을 자극하면, 내 머리는 참으로 성실하게 이유를 만들어 낸다. 마치 “이 피곤함에는 반드시 불행한 서사가 필요하다”는 듯이, 내 삶을 비극으로 해석하는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엮어 낸다. 나는 가끔 그 자아를 ‘내면의 소설가’라고 부른다. 그 소설가는 놀라울 만큼 창의적이다. 나를 연약하고 실패한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과거의 장면을 재구성하며, 미래를 어둡게 예측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 목소리를 미워했다.
그것은 나를 괴롭히는 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성으로 반박하고, 논리로 설득하고, 근거를 요구하며 맞섰다. “그 생각은 과장이다.” “그 감정은 사실이 아니다.” “그 결론은 성급하다.” 나는 치열하게 토론했다. 하지만 그 자아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지칠수록 더 또렷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쳤다.
주님은 사랑하고, 오래 참고, 인내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주로 타인을 향한 윤리로 이해해 왔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나를 오해하는 사람,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향해 참고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내 안으로 방향을 바꾸어 다가왔다. 내 안에서 나와 동거하며, 때로는 나를 괴롭히는 그 부정적 자아에게도 같은 태도를 적용할 수는 없을까.

물론 그것은 또 다른 인격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내 안에는 습관처럼 반복되는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를, 수많은 경험과 상처 속에서 굳어졌을지도 모를 목소리. 그 목소리를 나는 지금까지 밀어내고, 부정하고, 억누르려 했다. 그러나 미움은 그것을 잠재우지 못했다. 오히려 더 깊이 숨어 있다가, 내가 약해질 때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은 없을까.
사랑은 방임이 아니다. 사랑은 모든 욕망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려는 존재를 인내로 붙들고,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안의 부정적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차분하게 바라보고, 다시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마치 아이를 훈육하듯, 그러나 포기하지 않듯.

나는 깨닫는다.
내 안의 부정적 자아는 없애야 할 적이라기보다, 길들여야 할 부분일지 모른다. 그것이 생겨난 이유도, 아마 나를 보호하려는 어떤 왜곡된 시도였을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피하려고, 실패를 예방하려고, 미리 비관하여 상처를 덜 받으려는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기보다, 그 목적을 인정하되 방향을 바로잡는 것이 더 지혜로운 태도일 것이다.

나는 이제 매번 싸우기보다, 매번 인내하기로 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왜 또 이러느냐”고 화내기보다, “그래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로 한다. 그것이 진짜 자기 사랑이라 믿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이 깨달음을 글로 남긴다.
잊지 않기 위해서다.
내 안의 원수를 미워하는 대신, 사랑으로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어쩌면 신앙은 멀리 있는 거대한 이상을 붙드는 일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나 자신을 끝까지 인내하는 연습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