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소설가

by 신아르케

내 안에는 소설가가 있다.
그는 잠들지 않는다. 내가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의식의 순간에 깨어 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에 그는 즉각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사건은 그저 사건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의 손을 거치는 순간, 그것은 해석이 되고, 서사가 되고, 하나의 장면이 된다. 그렇게 나의 인생은 매 순간 쓰여진다.

나는 한동안 삶이 사건들의 총합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을 겪느냐가 곧 나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다. 같은 사건을 겪고도 누군가는 감사의 이야기로, 누군가는 비극의 이야기로 살아간다. 그 차이는 사건이 아니라 해석에 있었다. 환경은 비슷해도, 마음의 각도는 다르다. 그리고 그 각도가 인생의 장르를 결정한다.

오늘 하루만 떠올려 보아도 그렇다.
잠시 밖에 나갔을 때, 겨울 끝자락의 햇살이 내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말없이 문을 잡아 주던 낯선 사람의 배려가 있었다. 무사히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도 있다. 이것만 붙들어도 오늘은 충분히 감사의 날이 된다.

그러나 다른 장면도 있다.
주차할 때 뒤에서 조급하게 울리던 경적 소리. 계산대에서 느껴진 작은 불친절. 갑자기 끼어들던 차 한 대. 내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이것들만 확대해 붙들면 오늘은 쉽게 불만의 날이 된다.

사실 변한 것은 없다.
햇살도 있었고, 경적도 있었다. 배려도 있었고, 무례함도 있었다. 조건은 동일하다. 다만 내 안의 소설가가 무엇을 중심 장면으로 삼느냐에 따라 오늘의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생은 사건으로 이루어지기보다, 사건을 편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한 가지 질문이 생겼다.
나는 어떤 소설가와 함께 살고 있는가?
불행을 과장하는 작가인가, 아니면 작은 기쁨을 확대하는 작가인가?
나는 어떤 장면을 반복해서 되새기고, 어떤 기억을 진하게 남기고 있는가?

행복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해석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점점 또렷해진다. 물론 인간의 고통과 현실의 어려움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무엇을 중심으로 삼을지는 여전히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나의 내면은 매일 재료를 고른다. 감사의 재료를 택할지, 불평의 재료를 택할지.

나는 근력운동을 오래 하며 알게 되었다.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 탄탄한 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반복된 훈련이 근육을 만든다. 그리고 그 근육은 유지하지 않으면 빠르게 사라진다.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도, 사용을 멈추면 감각은 둔해진다.

행복도 그렇다.
행복은 기다린다고 찾아오지 않는다. 행복은 훈련을 통해 예리해지는 감각이다. 감사는 저절로 솟아오르는 감정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선택이다. 매일 무엇을 기억할지, 무엇을 확대할지, 무엇을 해석의 중심에 둘지를 연습해야 한다.

결국 나는 내 안의 소설가를 길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가 불평의 문장을 쓰려 할 때, 조용히 고쳐 써야 한다.
그가 비극으로 장면을 구성하려 할 때, 다른 각도를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문장을 바꾸다 보면, 어느새 인생의 장르는 달라질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 안의 소설가와 함께 하루를 정리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나는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

내 인생의 장르는, 결국 내가 반복해서 쓰는 문장들에 의해 결정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