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나는 묘한 경험을 한다. 위내시경과 장내시경을 위해 프로포폴을 맞고 누워 있으면, 의료진이 “깊게 숨 쉬세요”라고 말한다. 그 말을 따르는 순간, 나는 분명히 의식이 있었는데 다음 장면에서는 모든 것이 끝나 있다. 시간의 중간이 통째로 삭제된 느낌이다. 인생의 비디오에서 한 구간이 잘려 나간 것처럼, 나는 그 시간을 통과했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이 경험은 단순한 의료 행위 이상의 질문을 내 안에 남겼다. 죽음도 이런 것일까.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모든 시간이 지나 버리는, 주관적으로는 ‘순간’ 같은 상태가 아닐까. 성경은 죽음을 종종 “잠”이라고 표현한다. “잠자는 자들이 깨어난다”는 재림의 약속은, 죽음이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하나의 중단처럼 느껴지게 한다. 마취 상태에서의 체감처럼, 1년이든 천 년이든, 눈을 감았다 뜨는 이에게는 동일한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멈춘다. 이것이 단순한 비유인지, 실제 사후 상태에 대한 묘사인지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 전통은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이 지속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전통은 재림까지의 상태를 ‘잠’에 가깝게 이해한다. 나는 어느 한 편에 서기보다, 이 긴장 속에서 질문을 품고 서 있는 편이 더 정직하다고 느낀다. 마취의 체험은 교리를 확정하기 위한 증거가 아니라, 묵상을 돕는 상징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경험이 내게 준 통찰은 분명하다.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에도 세계는 계속 흘러갔고, 의료진은 내 몸을 돌보았으며, 나는 안전하게 다시 눈을 떴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도 생명은 유지되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어쩌면 이런 통제 상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통제 너머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눈을 감는 순간도 전적인 공백이 아니라 맡김의 행위가 될 수 있다.
건강검진은 또 다른 차원의 묵상을 남긴다. 위와 장을 비우기 위해 금식하고, 몸을 비워 내는 시간은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억지로라도 비워 내고 나면, 다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가 된다.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식사 한 끼가 선물처럼 다가온다. 나는 매년 3월이 되면 마치 시험을 치르듯 몸을 돌아본다. 몸은 나의 소유인 듯하지만, 동시에 나의 통제 밖에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검진은 그 사실을 상기시킨다.
프로포폴의 경험이 나에게는 경이롭고 독특한 체험으로 남았지만, 나는 동시에 그것의 위험성도 안다. 의식이 부드럽게 꺼지는 느낌은 매혹적일 수 있다. 끊임없는 긴장과 경쟁, 불면과 두려움 속에 사는 이들에게 그것은 유혹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그 약물에 의존하게 되는 비극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치료의 도구일 뿐, 현실을 벗어나는 탈출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깨어 있는 삶의 무게를 마취로 해결할 수는 없다.
마취에서 깨어난 순간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눈을 뜨면 여전히 이 세계가 있고, 여전히 나의 삶이 있다. 만약 죽음이 이와 비슷하다면, 그 다음 장면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세계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적어도 이 체험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도 생명은 이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 생명을 맡기고 살아간다는 신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눈을 감았다 뜨니,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단절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묵상은, 결국 더 잘 살기 위한 연습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