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미학과 신의 은총 속에서
우리는 종종 진리를 거창한 철학서나 신비한 계시 속에서 찾으려 하지만, 내가 체득한 가장 심오한 진리는 의외로 단순한 원리 속에 있었다. 삶은 균형 위에 선다는 것—이 단순한 깨달음은 나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中庸) 개념을 떠올리게 했다.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virtue)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과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중용’이란, 행동과 감정의 표현에서 과잉과 결핍 사이의 적절한 지점을 찾는 것이다. 이를테면, 용기는 과도하면 무모함이 되고, 결핍되면 비겁함이 되며, 절제는 지나치면 무감각이 되고 부족하면 방탕해진다. 자존감도 지나치면 오만해지고, 결핍되면 위축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덕이란 언제나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조율된 태도에서 생겨난다. 살아가며 시행착오를 겪을수록 나는 깨닫게 된다. 나 스스로 진리라 여겼던 어떤 신념들조차도, 대부분은 진리의 스펙트럼 한쪽에 위치한 단면적 인식에 불과했다는 것을.
동양의 음양론, 서양 철학의 선악·명암 이론 등은 문화적 언어의 차이일 뿐, 모두 ‘균형’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향하고 있다. 진리는 결코 한 방향에 치우쳐 있지 않다. 한 신념이 지나치게 강화되어 다른 관점과 삶의 양태를 배척하게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독단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중용의 덕’을 실제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욕망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주 중심을 잃는다. 철학자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내면에서 충돌하는 다양한 가치와 감정들을 조화롭게 결합해 내는 능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을 삶에 적용하자면, 삶이란 곧 예술이며, 중용이란 예술적 조율의 결과물이라는 통찰에 다다르게 된다.
삶에서 중용을 실천한다는 것은 단순히 중간값을 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혜롭고 의식적인 선택의 연속이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조율하는 고도의 능력이다. 그러나 나는 이 균형을 항상 유지할 만큼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실천적 태도는 단순하다. 하루 단위의 성찰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나의 감정과 행동, 신념과 판단을 돌아보며 묻는다. “나는 지금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었는가?” 이 반복적 질문이 나의 삶을 조금씩 바르게 조정해 준다. 이는 단지 나의 의지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신의 은총과 개입 없이는 이 방향 수정 또한 불완전하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회개’란, 죄책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다시 조율하는 ‘존재적 반성’의 행위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기도한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치우쳐 있는지 인식할 수 있는 분별력, 그리고 다시 바른 중심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십사고. 나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진 못하겠지만, 매일의 수정과 작은 반성이 모여 결국 큰길을 만든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결국 진리는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유지해야 할 ‘상태’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우리의 몸이 항상 신진대사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듯, 우리의 정신 또한 끊임없는 성찰과 조율을 통해 생기를 유지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진리를 균형 속에서 유지하려는 예술가의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그것이 내가 믿는 삶의 방식이며, 오늘 내가 선택한 존재의 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