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시간은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을까?
시간은 단지 흘러가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전제 조건이다. 칸트의 철학에 따르면, 시간은 인간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 인식의 틀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좌표 없이는 어떤 사건도, 어떤 변화도 인식할 수 없다. 인과관계란 결국 시간 위에서만 성립하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은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세계를 읽는 방식이다. 신학적 관점에서는 시간 또한 창조 질서의 일부로 이해된다. 신이 이 세계에 부여한 작동 원리 가운데 하나, 마치 중력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법칙을 분석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수용하고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정립해 간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일정량의 시간을 부여받았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이 유한한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제한되어 있기에 가치 있다. 우리는 무한히 공급되는 것에 대해 쉽게 무감각해진다. 공기와 물처럼, 생존에 절대적인 것조차 항상 주어진다면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 희소성은 가치의 조건이며, 인간은 그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절실히 자각한다.
그러므로 지각 있는 존재는 자신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직관적으로 안다. 그러나 정작 많은 사람들은 오늘을 영원처럼 살아간다. 죽음이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병이나 사고처럼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에서야 우리는 남은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진정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삶을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커진다.
나는 오늘, 이 글을 통해 스스로에게 다짐하고자 한다.
주어진 삶을 사소하고 헛된 생각들, 쓸모없는 감정들에 허비하지 않겠노라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불합리함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대신, 크지 않은 일이라면 더 이상 내 시간을 빼앗기지 않겠다. 그 시간은 더 중요한 사유와 감정, 더 본질적인 것들로 채우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실존하는 존재, 곧 사르트르가 말한 ‘대자’로서 내 삶을 구성할 수 있는 자유를 지녔다.
그 자유는 단순한 선택의 가능성이 아니라, 내면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주체성이다.
사소한 불편과 부정적 감정이 스며들려 할 때마다, 나는 삶의 주도권을 갖고 단호하게 NO를 외칠 것이다.
그것은 회피도 비겁함도 아니다. 오히려 정신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실존적 결단이다.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자 책임이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고, 그렇기에 더욱 정결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