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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시옷 Mar 04. 2024

쿠엔틴 타란티노는 평양냉면을 좋아한다.

아니다.

 

예, 아니오만 하라니까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존재 3가지를 골라보자면 나는 거리낌 없이 아이들과, 동물, 그리고 평양냉면을 뽑겠다. 상식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그중에서 나는 평양냉면을 저주한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그곳은 365일 내내 평양냉면을 먹어야만 하는 세상일 것이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미친 인간들은 전부 맛대가리 없는 평양냉면을 억지로 처먹는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이 나갔음이 분명하다.


한 가지 명시해두고 싶은데 나는 고깃집에 가면 항상 냉면을 시키는 사람이다. 물냉, 비냉 따지지 않는다. 살얼음 동동 뜬 공장제 육수에 식초를 두 바퀴, 겨자를 한 바퀴 반 돌려서 슥슥 비비고, 막 구워서 불같이 뜨거운 고기를 그대로 면 위에 올려 칭칭 감아 입안에 한가득 쑤셔 넣으면,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입 안 속 세계의 황홀함에 그야말로 탄복해 버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평양냉면이라니. 이름도 평양 - 냉면 이래 푸하하하하.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냉면'에 낯선 도시의 이미지가 침범을 하는 듯한, 그 이름부터 상당히 거슬린다.


마치 프라하김치전, 올란바토르잡채, 뉴욕오이무침. 그게 뭔데 도대체


게다가 책임감 없는 이름이라 더 짜증 난다. 평양V냉면이래 푸하하하. 그럼 평양'의' 냉면인지, 평양'에' 냉면인지, 평양'이' 냉면인지, 평양'와' 냉면인지 도통 알 수가 없잖아. 평양 다녀오신 분들이 좀 알려주시겠어요? 잘 알고 계시다고요?


불쾌하다. 불유쾌한 것과는 다르다. 불유쾌는 찬구와 규성이, 그리고 내가 만들 잡지의 제목이자 동인회의 명칭이다. 그리고 한 가지 고백하자면, 사실 내가 가장 불쾌하다 여기는 존재는 따로 있다. 평양냉면과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 장자가 살아서 봤다면 유레카! 하고 알몸으로 찜질방을 뛰쳐나가게 만들었을 인간들. 그게 쟤네다. 찬구, 규성 이 미친놈들. 이것들과 계모임 날짜를 정하다 보면 꼭 대화가 이런 식이다.


나 : 미리 말할게. 나는 끝이 옥이나 동으로 끝나는 곳에서는 수저를 들지 않겠다.

찬구 : 형, 젓가락으로 먹어야지.

규성 : 아니 근데 형, 이 집은 진짜 달라. 개 맛있음 (이 말만 벌써 5번째 듣는 중)


셋 중에 둘이 찬성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모르겠다. 내 처지는 또다시 도살장에 끌려가는 이름 없는 가축처럼 눈물을 흘리며 평양냉면이 내 목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려야만 한다. 만약 내가 죽어도 못 먹겠다고 난리 친다면 그들은 아주 가끔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다른 후보군을 읊어주기도 한다.


닭칼국수, 동파육, 무슨 듣도 보도 못한 특수부위 전골집.


아니 그냥 김밥천국 가자고. 육쌈냉면 가서 냉면이랑 만두 먹자고. 왜 항상 일반적인 맛이 없는 건데. 왜 항상 30분 지하철 타고, 20분 동안 처음 보는 골목 여기저기 굽이굽이 헤매고 들어가서 또 30분 동안 웨이팅을 해야 하는 건데. 왜 항상 1인당 기본 15000원씩 하는 건데. 이게 정녕 2024년을 살아가는 00년생, 99년생의 식성이란 말입니까. 대체 왜??


찬구 : 형, 평양냉면 배워야지. 영화 안 할 거야?


재밌네.



Do you know PyeongYangnaengmeon?



그러니까 귀엽고 잘생기고 이지적인 00년생 찬구의 말에 의하면 평양냉면은


배워야 한다.

영화감독이 응당 좋아해야 마땅하다.


라는 건데 하나씩 보자.



1. 평양냉면은 배워야 한다.


굉장히 불만스럽다. 입에 쑤셔 넣고 맛있으면 그만이지 왜 음식을, 맛을 배워야만 한다는 명목으로 괜히 '평냉은 3번 정도는 먹어 봐야 해~' 하는 건지. 더욱 어이없는 사실은, 그런 사람들 치고 평양냉면의 맛을 제대로 정의하는 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허영만 화백도, 수요미식회의 멋쟁이들도, 찬구도, 규성이도 전부 이렇다 할 단어를 제시하지 못하여 평양냉면의 맛은


'그냥 평양냉면 맛' 이라든지

'슴슴한 맛'(참고로 슴슴한 맛을 발음할 때, 두 번째 슴을 2초 정도 길게 끌어야 한다)

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표현으로 귀결된다.


참으로 어리석은 결론이다. 차라리 내가 뛰어난 과학자였다면 어땠을까.


"모르는 것 같아 알려주자면 인간의 미각에는 지방맛을 포함하여 총 여섯 가지의 맛이 있기에 '평양냉면 맛'이나, '슴슴한 맛'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어 이 멍청이들아. 평양냉면에는 MSG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고 이는 글루탐산으로써 감칠맛에 해당되니, 감칠맛이 나고, 짜고, 또, 또, 그게 전부다. 웩!" 아 좋다.


하지만 평양냉면의 맛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는 논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즉, 평양냉면의 맛은 아무도 모르는 맛이다. 따라서 평양냉면을 배운다는 일은 답이 없는 문제를 탐구하는 행위와 같다. 그럼에도 많은 평양냉면쟁이들은 어떠한 정답을 내린 듯 당당한 작태로 오늘도 평양냉면을 흡입한다. 이건 좀 흥미롭군.



2. 평양냉면은 영화감독이 응당 좋아해야 마땅하다.


영화감독들이란 지적 허영심에 뇌가 사로잡혀 어떻게든 본인의 지식과 지혜를 뽐내고 싶어 안달 난 사회 부적응자들이다. 그 안달 난 정도란 여간 병적인 게 아니어서, 그들은 무려 영화라는 것을 찍어 만천하에 공개하기에 이른다.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변태라고 명명한다.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전부 감독의 감독을 거친다. 아예 시나리오부터 직접 집필하는 감독들도 많다.  감독은 본인의 사유와 사상, 성적 취향, 성격, 가정사 이 모든 게 한 데 담긴 영상을 관객들한테 보여주고, 들려주고, 두고두고 보라고 아예 블루레이를 발매해 준다. 그러니까 영화를 감상한다는 행위는 감독의 나체를 대놓고 쳐다보는 일과 같다. 감독들은 이를 즐긴다.


본인의 나체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누가 봐도 훌륭한 육체를 가져야 할 것이며, 어떠한 기준에도 만족을 할 수 있는 걸출한 섹스어필 포인트 역시 갖춰야 함이 마땅하다. 말하자면 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자부심인 훌륭한 나체를 공개하고 싶어 하는 변태들이며 이 세상이 거대한 목욕탕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르키메데스들이다. 어우 징그러.

(참고로 감독의 반대는 배우다. 배우는 타인의 탈을 쓰고 본인을 감춘다. 따라서 보통 배우들은 옷을 잘 입는다. 반대로 감독이라는 자들은 항상 나체로 세상을 활보하고 싶어 하기에 옷을 잘 입는 사람이 별로 없다. 잘 생각해 보라.)


그래서인지 (적어도 내가 만나 본) 영화감독들은 다른 이들의 나체를 궁금해한다. 이게 여간 주위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게 아닌데, 감독들은 그러한 결례를 자꾸만 저지르며 사유를 확장시킨다. 즉 영화감독이란 집요하게 모든 사물에 질문을 던지는 인간이자, 세상에 대한 개인적 시각을 견지한 채, 답이 없는 물음에 대한 결론을 내어 보려 한평생 애쓰는 자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답이 없는 물음은 어쩌면 평양냉면의 맛일 수도 있겠네.


그러면 조금 이해가 갈지도?


  



좋은 게 뭔지 모르겠다. 좋은 영화는 뭐고, 좋은 사람은 뭐고, 좋은 음식은 무엇이며, 좋은 맛은 또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소망이 없다. 다만 인상적인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훗날 내가 죽어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인상적인 찰나로 기록되었으면 한다. 이는 ‘나’라는 존재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며,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이자, 글과 삶을 써 내려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참 어지간히도 힘든 시기가 찾아왔을 때 <펄프픽션>을 봤다. 여태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3류 싸구려 소설 같아서 좋았다. 말이 되지 않아서, 뻔뻔해서 즐거웠다.


계속 보다 보니 영화가 참 이상했다. 아마도 주인공이라 부를만한 인물이 죽는다. 영화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데 타란티노 영화의 테마는 복수가 아닌가? 특별히 복수당할 짓을 했었나?? 죽은 이유를 맞춰봐. 그때부터 이 작품은 나에게 잘 만든 추리소설이 되었다.


나름의 해답을 찾자 영화는 또다시 변화했다. 이제 이 작품은 타란티노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자서전으로 읽혔다. 말이 되어서, 솔직해서 흥미로웠다.


지금 나에게 <펄프픽션>은 나의 자기소개서로 변모하였다. 즉, 어쩌다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어떻게 삶을 살아가려 하는지에 대한 원인이자 설명이다. 말하자면 나는 비로소 <펄프픽션>을 소유하게 되었다. <펄프픽션>은 타란티노만의 것이 아니다. 내 것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관객들이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빠져나와 점심을 먹을 때쯤 ‘내 머릿속에서 그 영화가 자꾸만 떠오르는 이유가 뭐지?’ 하고 슬쩍 생각해 보게끔 만드는 작품이야말로 나는 (여전히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영화’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다른 관점을 통해 사유의 확장을 야기하는 것. 아마 그 관객들은 한동안 골치 좀 아플 테다. 왜냐하면 그건 마치 인생처럼 따로 답이 없는 문제거든. 어? 이거 완전



이제야 찬구의 큰 뜻을 겨우 핥을 수 있겠다.


펄프픽션이 나에게는 자기소개서, 찬구 규성에게는 그냥 영화, 주연이에게는 수면제, 바보한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효시, 누구에게는 평양냉면인 것처럼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독한 항해를 하는 것이 인생이고, 영화고, 평양냉면이다. 찬구와 규성이는 끈질긴 선문답을 통해 평양냉면을, 평양냉면의 맛을 소유한 녀석들이었다. 한국 영화계의 미래가 이리도 밝습니다. 보고 계시나요 홍상수 감독님?


그래서 이제야 평양냉면을 배울 생각이 들었냐 한다면





타란티노가 운영했던 한식당의 메뉴와 <펄프픽션>의 빅 카후나 버거다. 평양냉면이 맛있었으면 갈비 대신에 'Pyeongyang Cold Buckwheat Noodles'가 있었겠지. 사무엘 잭슨이 평양냉면 먹었겠지. 식초 뿌리는 놈은 총으로 쏴 죽이고.


그래서 찬구야, 규성아. 꺼져라. 너네는 지나친 음주와 흡연으로 혓바닥에 구멍이 뚫렸음이 분명하고, 이대로라면 서른을 넘기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가 평양냉면을 먹자고 칭얼대는 행동은 절실한 도움의 요청이자 구호라고 간주하여 형으로서 정신을 차리게 해 주마. 평양냉면 먹자고 또 해봐. 뺨때기를 후려버릴라.



퍽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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